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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Feb 25. 2022

약 20년 공부 인생 돌아보기 [#02]

목표가 없었던 중학교 시절

공부도 게임도 하지 않은 어중간한 시기

  중학교 때도 역시 공부는 뒷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에 당시 초고속 인터넷이었던 ADSL이 보급되면서 우리 집에도 인터넷이 들어왔고, 당시 인기 게임이었던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주축으로 온갖 온라인 게임에 푹 빠졌다.(놀랍지만, 당시 리니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처럼 썩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는 온라인 게임이 아니었다) 더욱이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일본어를 꽤 하시던 분이셔서, 이것 저것 일본어를 들을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나 추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좀 어중간하게 놀았나 보다. 이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해였을 텐데, 강렬한 추억이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아주 못한 것도 아니었다. 공부와 담을 쌓고 학원도 가지 않은 내가 평균 80점 초중반을 오갔으니까, 지금 떠올리면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공부와 담을 쌓고 오직 일본어와 게임에만 집중하던 나에게, 중학교 2학년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되었다.


나에게 2002년은 잠깐의 "목표"가 생겼던 시기

  우선, 중학교 2학년 때 2002년 월드컵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당시 학교에서 가장 무섭고 엄하다는 선생님이 담임을 맡는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미술은 한자어라고 하시면서 "아름다운 솜씨", 줄여서 "아솜"이라고 부르던 미술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친구들은 다들 알게 모르게 그 선생님을 "아솜"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은 학생의 할 일은 모름지기 공부라고 하시면서, 매일 스스로 공부한 흔적 (깜지라고 하면 알까? 공책 한 페이지 빼곡하게 공부한 흔적을 쓰는 것이다)을 검사하셨고, 시험 성적이 평균 얼마 이상 넘지 않으면 미술실에 갇혀서 자습을 해야 했다. 자습에서 벗어나려면 한 시간에 한 번씩 선생님이 내는 쪽지 시험에서 60점 이상 받아야 했다. 당시 휴대폰이 없었던 나는, 쪽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부모님에게 늦게 간단 이야기를 하지 못해 어머니를 울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집에 도착하니까 밤 8시 반이었다. 게다가 우리 학교가 상암 월드컵 경기장 바로 근처에 있었고,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거리 응원을 가기 위해 친구들이 응원 도구를 모두 가지고 왔음에도 그런 곳에 가면 위험하다고 토요일에 반 애들을 전부 미술실에 가둬 두고 서바이벌 쪽지 시험을 봤던 적도 있었다 (애초에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거리 응원에 내보내지 말라는 가정 통신문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나는 2002년 월드컵을 겪으면서도 거리 응원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사람이 되었다.

공부의 목표가 "싫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이게 효과적이었는지 상당히 고득점을 받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교회에 함께 다니던 신도 분에게 과외를 받게 되었다. 나 포함 우리 또래 4명이 모여서 수학 공부를 했는데, 당시 나는 "절대로 학교에 남고 싶지 않다"라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공부에 임했다.

  "목적"이 생기자 나의 시험 평균은 무시무시하게 올랐다. 매번 80점 초반에 놀던 시험 평균이 93점까지 올랐고, 수학도 처음으로 1개만 틀리는 등,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받곤 했다. 이 기세로 2학기 때 반장도 했고, 아무튼 여러모로 중학교 2학년은 기억에 남는 한 해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일본어와는 거리를 두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도무지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성격이었나 보다.


목표는 오래가지 않는구나

  중학교 3학년 때는 새로운 선생님이 대거 학교에 왔고, 나는 젊은 체육 선생님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친구처럼 대해주시면서 "공부를 못 해도 좋으니 씩씩하게 자라라"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나도 다시금 공부에 손을 조금씩 놓게 되었고, 다시 일본어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더욱이 인문계를 가느냐 실업계를 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뒤숭숭한 것도 있었는지, 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내가 자신을 냉정하게 분석했다면 억지로라도 "목적"을 만들어서 공부했었을 텐데, 이때의 나는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놀고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소위 덕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목적은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꼭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의 일본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참고로, "아솜" 선생님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싫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틀린 말은 하나도 하지 않으셨고 교칙을 잘 지키고 수업만 잘 듣고 성적만 어느 정도 받으면 한없이 자유를 주시던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을 미술실로 불러서 음악을 틀어주거나 감명 깊게 본 영화를 틀어주었고, 가끔 상담을 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모든 일을 제치고 가장 먼저 상담을 들어주시기도 하셨다. 언제 적은 기합을 받다가(지금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넘어져서 교복 바지가 찢어졌는데, 한동안은 엄하게 대하시다가 학생들을 모두 집에 보낸 후 나를 미술실로 불러서 바지를 전부 수선해주시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상당히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어떤 이유로든 학생들에게 "목적"을 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것이 모든 학생들에게 통용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방식이 제대로 통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2002년이 여러 의미로 아련하다. 초여름의 월드컵 분위기와 더불어, 그 선생님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살금살금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애수에 젖게 만든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추억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망가진 카세트테이프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 하나의 노래를 만들 듯이, 나의 기억 속에 남은 중학교 기억은 조각으로만 남아서 그것을 억지로 이어 붙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의 감정이나 공부에 대한 기억이 아주 확실하게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사실, 지금까지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고등학교 이후로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고, 여러모로 깨달은 일도 많으니까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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