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어 (Role-Language)>에 관하여
이 글은 재작년 즈음 모 합동지에 실릴 "예정"이었던 원고였다. 워낙 야심 차게 준비했던 잡지라서 힘을 들여 썼지만, 마감일인 12월 즈음 투고를 희망했던 사람들이 대거 연락 두절했다는 말과 함께 출판이 힘들겠다는 사과의 메일을 받았다. 그렇게 그 원고는 클라우드에 고이 잠들었다.
그렇게 약 2년이 지난 지금,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이 원고를 발견했다. 논문 초안들과 차마 브런치에 싣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섞인 아수라장 안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몇 안 되는 원고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이 원고를 조금 더 다듬는 식으로 올리고 싶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국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진 않았겠지만, 조금은 더 쉽게, 조금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술을 몸에 익혔다는 자신감 아닌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나의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보고 싶었다)
A4용지로 4~6페이지를 빼곡하게 적은 글을 쉽게 풀어쓰는 형식이 될 것이다. 아마 이번 한 번에 담아내긴 어렵겠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또,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초점을 맞춘 글이 될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캐릭터를 중심으로 언어나 작품을 연구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여, 이번 시도는 꽤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되리라 믿고 있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캐릭터>가 있다
우선, 캐릭터란 무엇일까? 네이버 국어사전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다.
명사
1.소설이나 연극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작품 내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개성과 이미지.
2.소설, 만화, 극 따위에 등장하는 독특한 인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디자인에 도입한 것. 장난감이나 문구, 아동용 의류 따위에 많이 쓴다.
3.정보·통신 키보드를 눌러서 화면에 나타낼 수 있는 한글, 알파벳, 한자, 숫자, 구두점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도 평소에 캐릭터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떤 기업의 캐릭터, 어떤 만화의 캐릭터, 캐릭터 상품 등등 우리 생활에는 이미 "캐릭터"라는 말이 침투해 있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한국어뿐 아니라 일본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표현하는 캐릭터는 1번 의미에 가장 가깝다. 인물 안에 깃든 성격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수도 있겠다. 가령, 평소에는 조용하던 회사 신입이 마이크만 잡으면 유사 록커가 되는 상황을 목격하면 우리는 "저 친구 저런 성격 아니었는데 의외네"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을 일본어에서는 "캐릭터가 다르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 쓰는 캐릭터란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캐릭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언어에도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처음 만난 누군가 혹은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성격이니까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라고 은연중에 그 사람을 정의한다. 이것은 본능과도 같아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처리된다는 점이 무섭다. 이것을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라고 한다. 만약 이 분류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겪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아가야만 한다. 흔히들 화려한 버섯은 독버섯이라고 하고 다가가지 않는데, 만약 우리에게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독버섯인 줄도 모르고 덥석 먹을 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했지만, 우리가 처음 보는 버섯이라고 해도 너무 화려하면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는 (설령 그것이 독버섯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본능적인 움직임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말을 다시 언어학으로 돌려보자. 위에서 버섯의 예를 들었듯, 우리는 은연중에 대명사, 단어, 분말 표현 등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을 멋대로 판단하곤 한다. 긴스이 사토시 선생님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언어를 "역할어(Role-Language)"라고 정의하였다. 어떠한 말을 들었을 때 해당 인물의 생김새, 성격, 옷차림, 사회적 지위가 떠오르거나 생김새, 성격, 옷차림, 사회적 지위로 판단했을 때 그 인물이 할법한 말이 떠오르면 그 말이 바로 역할어라고 한다. 지극히 일본어적인 개념이기에 우리말에는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지만, 유독 들어맞는 캐릭터가 있다.
요즘 드라마에서 많이 보지 못하고 더욱이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진부한 대사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을 한 인물의 생김새, 성격, 옷차림, 사회적 지위, 심지어 배우(!)마저 떠올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인물이 극 중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하게"는 명령의 의미와 화자의 높은 품격을 동시에 포함한 어말 표현이다. 이 표현만으로 우리는 해당 인물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며 자신도 그 지위를 인식하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한다. 실제로 이 말은 꼭 이런 사모님이 아니더라도 회사 상사, 나이 지긋한 어른 등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쓰곤 한다. 여기에 "우리 아들(딸)과~"라는 대사를 통해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성격이 합쳐지며 돈 많고 오만한 캐릭터가 완성된다.
반대로 이런 특징을 가진 인물의 외모를 보면 분명 저것과 비슷한 대사를 하겠거니 하고 기대(?)하게 된다. 만약에 극 중에서 그 역할이 틀어지면 우리는 그 인물에 더 깊게 집중하게 된다. 이를 소위 클리셰 파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그 인물에게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성격을 주지 않았는지 그 당위성을 찾기 위해 애쓴다. 만약에 그 당위성이 정당하게 부여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현실의 재벌가 사모님들은 저렇지 않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진위를 파악할 순 없지만, 적어도 드라마처럼 극적이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보고 듣지 못함에도 우리는 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는 다름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즉,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현실의 언어(우리가 실생활에서 쓰는 언어)"와 "가상의 언어(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 가상 매체에서 쓰는 언어)", 이렇게 2가지 언어 체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이 둘의 경계는 액체처럼 무척 모호해서 대다수 사람은 이러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하게"라는 말을 들을 일은 거의 없고 듣는다 해도 어색함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중2병 감성"이 뿜어 나오는 말이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현실"과 "가상"의 언어 체계가 구분되어 있고, 양 체계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모든 사람의 의식에 은연중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언어 체계는 "가상의 언어"다. 한국어에 비해 다양한 대명사와 어말 표현이 발달한 일본어에서 주로 보이는 언어적 특징으로, 이것을 브런치에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소정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본다. 나의 연구 분야와도 관련된 부분이라 자칫 어려워지려는 문장을 되도록 쉽게 풀어쓰려고 노력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이 부분은 원래 투고하려고 했던 전체 원고의 10% 분량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짬이 날 때마다 조금씩 정리해서 어엿한 브런치 북을 하나 완성함을 목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