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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Feb 23. 2023

"씨"와 "님"의 아찔한 동거

일본어 서브 컬처 작품의 직역 문제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만든 게임 시리즈인데, 지금까지는 직역으로 번역되어 있던 것이 이번 작품부터는 노선을 틀어 한국어로 들었을 때 비교적 자연스러운 의역으로 바뀌었죠. 모 게임 커뮤니티 사이즈의 리뷰에서는 이러한 번역 기조의 변경이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기존 팬들이 많이 모여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그중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 말이었습니다. 오타쿠(일본 문화에 심취한 사람을 가리키는 멸칭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조적인 의미로 자신들을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한다)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은 당연히 직역으로 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 글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요즘 세상에 직역으로 번역을 제출했다간 일거리가 바로 끊겨버리니까요.

  요즘은 번역 시장의 방향성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번역 시장의 방향성이 바뀐 이유는 AI 발전으로 인한 기계 번역 기술의 발달 때문이죠. 요즘은 번역기가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문장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번역가는 AI가 못하는 문맥 파악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번역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번역기랑 똑같은 번역을 제공하면 누가 인건비를 쓰면서 사람을 고용할까요?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려는 요즘 세상에 그런 자선 사업가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시 팬들이 모여있던 그 인터넷 커뮤니티로 돌아갑시다. 여기에는 제 눈을 끌었던 또 하나의 글이 있었는데요. 사실 그 글이 이 주제로 썰을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커뮤니티 특성상 상당히 과격한 표현이 많았는데, 순화해서 정리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전 작품에서는 "~씨"라고 불렀던 호칭을 전부 "~님"으로 바꾸어버렸는데, 이건 명백한 오역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A(캐릭터 이름)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불러왔고, 그 호칭이 굳어지면서 사람 간의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씨"를 "~님"이라고 번역한 것은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번역이자 오역입니다."


  자신을 일본어 통번역가라고 밝힌 사람이 쓴 이 글의 요지는, 일본어의 "さん~(~상, 우리말의 ~씨에 해당하는 말)"을 "~様 (~사마, 우리말의 ~님에 해당하는 말)"에 해당하는 말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번역 방향성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해당 게임 시리즈를 꾸준히 해온 바에 의하면, 저기서 주장한 A는 무척 성실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예의 바른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공경의 의미를 담아 "~씨"라고 하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요? 이 번역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한국어 모어 화자입니다. 그런데 왜 일본어 체계를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할까요?


  우리가 손윗사람(혹은 처음 보는 사람)을 지칭할 때 보통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세요. "OO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OO 씨"라고 부르면, 상대방은 그렇게 부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안전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님"은 상대를 높여주며 자신의 품위도 지켜주는 지칭이므로 이 대명사를 사용해서 나쁠 건 없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씨"는 굉장히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쓰입니다. 보통은 수평적 관계에서(수직 관계라고 해도 아랫사람을 친근하고 예의 있게 부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럼 친근한 사람을 부를 땐 어떻게 하냐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애초에 "~씨"를 쓰지 않습니다. 형, 오빠, 누나, 언니라는 대명사가 있으니까요.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씨"에 존경의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면 "거기, 김 씨!"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아 저 사람이 나를 존경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해야겠지요. 보통은 '왜 굳이 저렇게 부르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한국어의 "~씨"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さん"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손윗사람 손아랫사람 상관없이 쓸 수 있고, 한국어보다 예의의 정도가 조금 더 높습니다. 동시에 친근한 손윗사람을 지칭할 때도 쓸 수 있고요. 또 일본어에서 형, 오빠, 누나, 언니와 같은 대명사는 같은 가족 내에서만 사용할 뿐 친인척 이외의 사람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さん"이 꿰차고 들어 있는 거죠.

  반면 우리말의 "님"에 해당하는 "様"은 조금 더 격식을 차린 느낌입니다. 친근함보다는 존경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들어있죠. 보통 인간관계에서 "様"를 쓰면 주종 관계, 상하 관계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실제로 제가 전공한 역할어(Role Language) 이론에 따르면 이 호칭만으로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데,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글을 써보겠습니다.


  이처럼 "씨"와 "님"은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절대 1:1 대응되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가 다르니 사고방식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니 언어 체계도 다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한국어의 존댓말 체계는 나이와 지위에 따른 수직 구조이고 일본어는 친근감이나 소속감에 따른 수평 구조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왜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さん"은 "씨"로, "様"는 "님"으로 해야 한다는, 넓게 보면 유독 일본어는 직역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버린 걸까요.

  저는 이 이유를 일본어 교육에서 찾았습니다. 여전히 일본어는 배우기 쉬운 언어 중 하나입니다. 언어 구조가 한국어와 똑같은 주어, 목적어, 동사 구조니까요. 같은 한 자권이므로 단어 외우기도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리고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우리말을 그대로 일본어로 옮겨도 의사소통이 됩니다. 일본어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이 고착화되고, 2000년 전후로 우리나라에 많이 유입된 라이트 노벨과 만화 장르에서 이러한 1:1 번역이 굉장히 많이 자행되었습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으니 일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번역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시기였죠. 이러한 번역물을 향유하며 살아온 구입자층이 다시 사회에 나와 "일본어 번역은 쉽다"라는 생각으로 또다시 직역을 반복하고, 결국 다람쥐 쳇바퀴 같은 악순환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불러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번역은 출발 언어의 의미와 뉘앙스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도착 언어의 사정에 맞게 재구성하는 고도의 작업입니다. 사전 의미에 따라서 1:1 대응만 하는 건 번역이 아니라 해석이죠. (그래서 저는 기계 번역이 인간 번역가를 100%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하지 않으면!", "~절대 무리야!"와 같은, 일본어에서만 통용될 만한 뉘앙스와 뜻을 가진 문장을 그대로 한국어에 억지로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이상한지 모르겠다면, 저런 번역이 일본어가 아닌 영어를 비롯한 외화 자막에도 쓰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어색하다면 올바른 한국어 표현이 아닌 겁니다.

  물론 이러한 직역이 필요한 분야도 분명히 있습니다. 뜻을 온전히 전달하지 않으면 오해가 벌어져 논쟁이 될 수 있을 만한 전문 서적 등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문장 구조나 단어가 있더라도 되도록 그대로 번역함이 옳죠. 하지만 이제 대다수 분야에서 직역은 필요 없습니다. 오타쿠 문화니까 직역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번역가는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 실력자여야 오래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는데, 귀를 막고 직역을 고수함은 자신을 발전시키지 않고 도리어 현실에서 눈을 돌려버리는 위험한 행동이라고도 봅니다.

  이번에는 타인을 존경하는 호칭 "さん"과 "様"만 언급했지만, 사실 아직 언급할 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본어에서 반말을 쓰는 캐릭터를 전부 존댓말로 바꾸어서 캐릭터를 손상시켰다"라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던 게임도 있거든요. 이것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풀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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