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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Oct 24. 2021

<반역>일까 <번역>일까 #02

<직역>과 <번역>, 그 미묘한 사이

  늘 드는 생각이지만, 번역은 참 힘든 작업이다.

  번역기의 발달과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증가로 인해,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박혔다. 게임에 한정해서 본다면 외국어를 잘하는 팬들이 모여서 무료로 한국어 번역을 해 주기도 한다. 게이머들은 "외국어보다는 그래도 한국어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어디냐"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패치를 칭찬하지만, 사실 유저 한국어화에서 번역 퀄리티가 뛰어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저들은 "한국어니까"라는 이유로 번역체를 옹호한다. 문제는 이것이 전반적인 번역의 질을 하락시키고 있다. 번역에 딴지를 거는 사람을 꼰대라고 하면서 밥그릇 뺏으니까 불안하냐는 식으로 비꼬는 사람도 있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운운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2010년 전후로 자주 보던 말들이라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두에 썼듯, 나 역시 번역가로서 한참 모자라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소위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쓰고 보니까, "소위"가 내 말버릇임을 눈물이 날 정도로 알게 됐다. 사실 몇 번 지적받은 내용이기도 한데, 여기에서는 반성의 의미로(?) 그냥 쓰도록 하겠다.) 자신감이 많이 깎여 나갔지만 그래도 좋은 팀원 분들과 좋은 상사 분들을 만나서 많이 배우는 사이에 그래도 "평균 언저리 번역가"라는 타이틀은 보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다른 분들의 번역을 지적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이것들을 가슴에 묻어두고만 있었지만... 너무 묵혀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내가 성장하기 이전에(?) 풀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실 아래 번역들은 각각의 사정들이 필시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껏 봐오면서 아쉬웠던 점들을 한탄(?)하는 수준으로만 받아들이면 괜찮을 것 같다. 사실 번역에 정답은 없으니까 말이다.



꼭 이렇게 강압적인 문장으로 번역해야 했을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교토를 배경으로 한 선배와 후배의 썸 아닌 썸 이야기로, 굳이 따지자면 메타포가 가득한 예술 작품에 가깝다. 하지만 묘사 방식이 난해한 건 둘째 치더라도 이야기 전개나 결말은 상당히 간결하고 간질간질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TMI겠지만, 나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모든 작품, "곤 사토시" 감독의 모든 작품,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라는 작품을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이 작품(애니메이션)을 알게 된 2017년 이후로, 나는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레 원문을 찾아보게 되었고, 원문을 보고 나서야 제목을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감정과 동시에 "왜 이렇게 했지?"란 새로운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 작품의 원제목인 "夜は短し歩けよ乙女"는 1915년 일본에서 유행했던 "곤돌라 노래"라는 노래의 모두에 나오는 "いのち短し恋せよ乙女"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夜は短し/歩けよ乙女"는 앞뒤로 7 글자씩 나눌 수 있어서 일본이 좋아하는 시 형식인 7자 및 5자 형식에도 부합한다. 문제는 이렇게 시적인 문구가 어떻게 "걸어 아가씨야"라는 다소 위협적인(?) 말투로 번역되었는가...이다.

  "短し"는 "短い"의 문어체로 고대 일본어에 속한다. 사실 이것이 1915년대 유행했던 일본어 노래 가사를 따온 것이니 고대 일본어가 쓰인 것 또한 당연한 이치 이리라. 그래서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고대 일본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번역해야 했다.

  여기서 문제는 "歩けよ"라는 단어이다. 이 부분을 현대 일본어에서는 "歩け"라는 명령형과 "よ"라는 종조사(우리말에는 의문을 나타내는 "~까"말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문법 요소다. 일본어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쓰이며 이 종조사 하나로 문장 전체의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로 나눌 수 있고, 그래서 "걸어!"라는 명령조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몹시 크다. 하지만 상술했듯 이 문장은 고대 일본어다. 고대 일본어에서는 "歩けよ(arukeyo)"의 후반에 있는 "-えよ(-eyo)"가 한 덩어리로 명령형+강한 주장을 나타낸다. 게다가 일본어 문어체다 보니까 "~해라!"라는 구어체적 번역보다는 "~하거라!"라는 식의 번역이 훨씬 자연스럽다.

  "乙女"를 "아가씨"라고 한 부분도 다소 의아하다. 물론 이 "乙女"에 1:1로 해당하는 우리말 단어는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감각으로 이 "乙女"는 "소녀"와 "성인 여성"의 중간, 그러니까 중고등학생에서 사회에 발을 내디뎌서 당시의 결혼 적령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여성(나이로 따지면 약 15세 ~ 25세 정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작품 내적으로도 여자 주인공은 대학 신입생 혹은 대학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물로 묘사되며, 하룻밤 동안 온갖 사건에 휘말리며 선배의 호감을 깨달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에서는 "아가씨"보다는 "소녀"가 조금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만약 나였다면, 임시 번역으로 "밤은 짧다. (그러니까) 걸으라, 소녀여.", "밤은 짧으니 걸으라, 소녀여."라는 식으로 했을 것이다. (참고로 "いのち短し恋せよ乙女"는 "삶은 짧으니 사랑하라, 소녀여."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가씨"보다는 "소녀"가 조금 더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이제 여기에서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일본어의 시적 표현인 7글자/7글자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나라 시조 형식도 무척 많지만, 여기에 맞춘다면 정형시의 첫 번째 구의 형식인 "3,4/3,4"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맞추려면 원문에서 다소 멀어져야 해서, 이 부분은 이제 많은 협의(?)를 거쳐야겠지만 말이다.

  번역가 분은 다른 번역을 제출했는데 출판사와 다른 분들과의 어른의 사정(?)에 의해 제목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하지만 원문은 몹시 시적인 느낌이 드는 말인데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강압적"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원작도 애니메이션도 강압적이지 않은 내용인데 말이다.


夜は短し歩けよ乙女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으니 걸으라, 소녀여



한국어인데 일본어가 보여요


  여기서부터는 흐름이 180도 바뀐다.

  9월부터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월드 플리퍼"라는 게임이 있다. 사실 나는 이 게임이 일본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던 날부터 즐기고 있었는데 게임 시스템이 복잡하고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 귀찮아서 반쯤 손을 놓고 있던 상태였다. 일본어 버전을 주변에서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자, 나는 차라리 "내가 번역을 해서 유튜브에 올릴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준비를 하던 와중에 한국에 정식으로 서비스를 개시할 것이라는 뉴스 기사가 나왔고, 그날 이후 나는 번역 작업을 포기하고 손꼽아 게임이 서비스할 날을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제는... 번역이 처참하리만큼 질이 낮았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어라서 말은 통한다. 하지만 이따금 한국어임에도 무슨 말인지 모를 대사가 튀어나오고, 심지어 한국어를 보는데 일본어 원문이 보이는 수준에 이르렀다. 심지어 일본 한자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용어들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메인 스토리 2장의 번역은 처참한 수준인데,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기계번역(번역기를 사용한 번역)을 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우리말은 아닌 듯 보인다.


  "지하로 통하고 있어"는 "地下に通じている", "호랑이가 보금자리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 안이겠지"는 "虎が住処にするならば、この奥だろう"류의 일본어였으리라.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요즘은 현지화라고 말하는 추세이지만)은 도착어로 번역된 문장을 보았을 때 출발어를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딱 그 생각에 반하는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한국어임에도 일본어가 보인다. 그것도 몹시 노골적으로.

  "通じる"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로 통한다"가 맞다. 하지만 뉘앙스적으로는 단순히 "통하는" 과정이 아니라 특정 도착점에 도달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저런 길을 목전에 두었을 때 "지하로 통하고 있어"라는 말을 사용할까. 이 말을 하면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이라는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확 들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지하로 이어지는 길이네." 혹은 "지하로 연결된 길이네."라는 식으로 "通じる"의 뜻을 살리되 문맥에 맞게 번역했을 것이다.

  이 "월드 플리퍼"에는 이외에도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일단 특정 인물의 말이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는 것은 기본이요, "~さん"에 해당하는 말을 무조건 "~씨"로 바꾸어서 어색한 문장을 만들어놨다. (우리말에서 "~씨"라는 호칭은 몹시 한정적으로만 쓰인다. 실생활을 떠올려 보라. 생각보다 많이 듣지 못할 호칭이다. 우리말이라면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님"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들이 사용하는 기술 가운데 하나인 "応援要請"을 "응원 요청"이라고 한 것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우리말에서 응원은 "파이팅"의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위의 용법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일본어에서는 "응원이 온다!"라는 식으로 쓰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에는 "증원 요청"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플레이어들에게 무작정 참가 신청을 보내는 "救援要請"을 "구원 요청"이라고 또 1:1로 번역했다. 우리말에서 "구원"은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우리말로 옮길 때에는 "구조 요청"리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번역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다


  물론 정해진 번역 스타일이 있어서 그 가이드라인에 따랐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 "원문을 직역해 주세요"라는 가이드라인이 왔다고 한들, 이 정도의 직역은... 고개를 상당히 갸웃하게 만든다. 용어 통일도 되어있지 않고 스토리마다 번역 퀄리티가 차이가 나는 등 (일부 에피소드는 번역이 상대적으로 깔끔하게 된 부분도 많다. 하지만 저 에피소드의 번역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팀원들이 소통을 전혀 하지 않고 검수도 면밀하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번역을 혼자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이것은 번역에만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지만) 다른 팀원들과 소통하며 작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모든 번역에는 개개인의 스타일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고, 아무리 정해진 가이드가 있다고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법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번역은 더욱 아쉬움을 자아낸다. 한편으로는 번역을 단순히 "우리말로 옮기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모두에서 말한 번역 퀄리티 하락은 바로 이런 쪽으로 영향을 준다. 팀원들의 티키타카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팀원들을 모아 두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은 게임 하나를 번역하면 해산, 하나를 번역하면 해산, 이렇게 되다 보니까 번역이 좋지 않게 나와도 책임질 사람이 없어진다. 어떻게 보면 번역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고 번역 작업을 단순한 1회성으로 취급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불러온 비극 아닌 비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은 참 힘든 직업이다. 아마 내가 했던 번역도 분명 누군가가 보면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일 수도 있으리라. 답이 없기 때문에,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1:1 번역을 하지 않고 문맥에 맞추어서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우리말 위주의 번역"을 했으면 한다. 번역가는 단순히 글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문화와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어, 그것을 사람들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절하고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 그리고 우리 팀원 분들, 우리 회사의 상사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마 그래서 내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번역을 의뢰하는 쪽, 그리고 하는 쪽도, 번역이라는 행위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접근하는 풍토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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