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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Aug 26. 2019

게임 <역전재판>의 번역

<직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상당히 아쉬운 번역

  <역전재판>이라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플레이어는 <변호사>가 되어 승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용의자나 증인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증거나 범인 행동의 모순을 이끌어내어 궁지에 몰릴대로 몰린 재판을 한 순간에 역전시킨다. 그 과정에서 영매 요소를 통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심리를 꿰뚫거나 앵무새나 무전기가 증인으로 등장하며 범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이 자기 증언에 휘말려 망가지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런 복합적인 요소가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현재까지 약 열 개가 넘는 소프트가 발매되었다. 최근에는 <역전재판> 시리즈 1, 2, 3편의 그래픽을 향상한 리마스터판이 발매되었고 공식 한국어 패치가 이루어져 한국어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1, 2, 3편이 발매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넥슨이 유통을 도맡아 한국어화를 진행한 피처폰(스마트폰 이전 각 통신사 마켓이 존재하던 시절의 폴더폰) 버전이 이미 존재한다. 그 후 스마트폰 버전으로도 출시되었는데, 초반에 넥슨 로고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제작사가 번역을 사들여 적용하였다고 추측된다. 번역은 피처폰 저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유저들이 힘을 모아 (물론 불법 다운로드를 조장하였지만) 한국어화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이번 공식 한국어 패치는 넥슨이 맡아서 한 번역에 일부 수정을 가한 수준이다. 기존에 비판받았던 내용이 여럿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잘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내용을 피상적으로 번역했을 뿐 캐릭터성이나 문화를 잘 번역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번역이 아닌 직역 수준에 머물러있다.


한일 양국의 존댓말 시스템 차이

  주인공 <나루호도 류이치(이하 나루호도)>의 스승인 <아야사토 치히로(이하 치히로)>와 그녀의 여동생인 <아야사토 마요이>의 말투가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일본어에서는 보통체, 즉 존대가 아닌 반말투로 되어있었음에도 한국어 번역에서는 존댓말로 바뀌어있던 것이다.

  나루호도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아야사토 마요이(이하 마요이)>의 말투가 존댓말로 바뀐 것은 우리나라의 존댓말 시스템을 생각하면 적절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존댓말 시스템, 일본의 경어 시스템은 한일 양국 간 미묘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은 보통 수직적 관계에 입각하여 나이, 계급에 따라 존댓말이 결정되는 반면 일본은 보통 수평적 관계에 입각하여 <거리>에 따라 존댓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거리>라는 것은 이른바 내적 친밀감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즉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존대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차치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아닌 것이, 동시에 이것이 말하는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즉, 나이나 계급에 따른 말투는 없더라도, 사회 일반적으로는 처음 본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하게 생각하더라도 존대를 사용하는 것이 품위 있는 행위라는 인식이 퍼져있다는 것이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동년배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상하 계급이 아닌 <존중>과 <자신의 품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요이>는 작중 일관적으로 주인공 <나루호도>에게 반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언니를 통해 몇 번 들은 적이 있기에 내적 친밀감이 높아진 상태이며 무시무시한 친화력과 포용력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일본의 <마요이>는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나루호도>에게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즉 그녀의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어>의 존댓말 시스템으로는 이런 점을 나타내기가 힘들다. 최근 들어 한일 양국의 존댓말 체계가 양국의 중간 정도로 수렴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인식 속의 존댓말 체계는 여전히 과거의 그것이다.

말괄량이 성격의 <마요이>는 상당한 포용력을 지녔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마요이>가 <나루호도>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지극히, 어찌 보면 당연한 변화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문제는 존댓말을 사용함으로 인해 그녀의 <허물 없>고 <포용력>이 있다는 캐릭터가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차라리 초반에는 존댓말을 사용하다가 반말로 바꾸어도 되냐는 식으로 문맥을 고쳤으면 어떨까 한다. 우리나라 존댓말에는 계급에 수반된 <존중>의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있는데, <마요이>의 평소 행동이나 단어 선택은 여전히 <나루호도>를 무시하고 놀리는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데 반해 한국어 번역판의 전체적인 말투는 존댓말이니, 참 무슨 캐릭터인지 도통 감을 잡기가 힘들다. 다행히 최근에 발매된 번역판에는 존댓말이 반말로 바뀌어 있었으며 <나루호도 군>이라고 부르던 말투에서도 <군>이 빠지는 등 다소 번역다운 번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마요이>의 번역은 한국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쳐도 <치히로>까지 존댓말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치히로>는 <나루호도>의 스승이자 선임 변호사이며 작중에서도 늘 자신감에 넘치고 주인공 <나후로도>를 놀리면서 진지한 상황에서는 강하게 조언할 줄 아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계급과 나이를 보더라도 그녀가 반말을 써도 무방한 상황이거늘, 여기에서는 또 존댓말을 선택함으로써 일본 존댓말 체계의 <배려>나 <자기 품위>를 선택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존댓말 체계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두 자매의 캐릭터를 파악하기가 다소 난해해졌다. 물론 이것이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은 없을지언정, 좋은 번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은 바로 일관성이 없다는 점에 있다.


초등학생이 <자네>라는 말을 써요?

  주인공 <나루호도>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검사, 즉 라이벌 포지션 인물인 <미츠루기 레이지(이하 미츠루기)>는 귀공자 스타일의 인물이다. 영국 귀족이 입을 법한 프릴이 달린 옷을 입고 보랏빛 양복을 걸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곧잘 했고 운동 신경도 좋은 이른바 엄친아적인 인물이다. 양복이 보라색인 이유는 <나루호도>가 파란색 양복을 입고 있으므로 그와 대비되는, 즉 라이벌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보랏빛(이라기보다는 팥색)이 일본 황실을 나타내는 색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미츠루기는 만사에 능통하며 다소 오만한 성격으로 그려진다.

  <역전재판 1> 후반부에 <나루호도>와 <미츠루기>가 초등학교 시절 학급 회의에서 논쟁을 벌이던 회상 씬이 나오는데, 나는 이 부분 번역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맥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저 텍스트만 가지고 번역했을 것이라 믿고 싶은 부분이었다. 초등학생 <미츠루기>가 <나루호도>를 가리키며 <자네>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투만 떼어놓고 보면 중년 어르신이 떠오르지만, 실상은 초등학생이다

  물론 어른 시점에서 <미츠루기>도 <나루호도>를 자네라고 부르며 다소 깔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본어 이인칭  <키미(君)>를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문제는 초등학교 시절의 <키미(君)>마저도 자네라고 번역해 버린 점에 있다. 우선, 초등학생이 이런 말을 쓰면 애늙은이 취급을 받을지언정 무엇보다 이런 말을 현실에서 쓰는 사람도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네>는 한국어 체계에서도 특정 캐릭터를 나타내는 말로써만 쓰이며 현실에서는 자취를 거의 감춘, 다소 특이한 포지션에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 체계는 수직적 관계에 입각한 표현이 많으며, 위에서 말한 <존댓말> 시스템과 더불어 인칭 시스템도 이 영향에 놓여있다. <자네>라는 표현도 우리말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바꿔 말하면 다소 내려다보는 뉘앙스가 강한 인칭대명사로 쓰인다. 예전 <무한도전>의 콩트 코너였던 <무한상사>에서, 노홍철 씨가 설정상 동기로 등장한 하하 씨에게 <자네>라는 말을 썼고, 하하 씨가 그에 공분하며 무시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본어 체계에서 <키미(君)>라는 인칭대명사는, 물론 한국어와 비슷한 수직적 이미지가 존재하지만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훨씬 강하게 내뿜는다. 에도 후기부터 등장한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 즉 <서생>들이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타인을 <키미(君)>라고 칭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인칭대명사의 이미지는, 공부를 잘하는 두뇌파 인물이며 다소 품위가 있는 인물이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 현재도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키미(君)>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주군을 뜻하는 다소 높은 말이었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이미지가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어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어 체계, 특히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어린아이들이 <키미(君)>라는 말을 쓰더라도, 아 이 인물은 공부를 잘하고 얌전한 사람이겠구나라고 인정할 뿐이다. <도라에몽>에 등장하는 <데키스기(똘똘이, 박영민)>도 일본판에서는 <키미(君)>를 곧잘 쓰곤 하는데, 그 역시 작중 최고의 지식인으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자네>에 관련된 양국의 이미지가 이토록 다른데도 한국어는 그저 <키미(君)>=<자네>라는 1차원적인 번역을 통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해냈다. 거만하며 공부를 잘하는 캐릭터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었다면, 특히나 그것이 나이가 다소 어린 초등학생이었다면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쓸만한 말을 선택했어야 했다. 개인적인 감각으로는, 공부를 잘하면서 다소 오만한 아이들은 상대를 부를 때 성과 이름을 동시에 부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 씨가 반장으로 등장하는 다수의 코너에서, 예를 들어 노홍철 씨를 부를 때에도 평소에는 "홍철아"라고 부르던 것을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는 "야, 노홍철!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자네가 아니지?"라는 말을 다소 길어지더라도 "나루호도 류이치, 너는 아니지?"라는 식으로 풀어서 번역했으면 어색함도 사라지며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제대로 된 번역을 해야 할 때

  나는 다수의 명작을 번역했던 번역가 분과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짧은 번역 수업을 받으며 초벌 번역만 몇 번 했던, 어찌 보면 경력이 없는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저 번역을 맡았더라도 캐릭터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적어도 문맥을 파악하며 내용과 캐릭터를 한국어로 옮기기 위한 노력은 조금 더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한다. 그만큼 <역전재판> 한국어 버전은, 내용은 이해가 될지언정 어색한 문법이 많고 캐릭터성도 잘 살리지 못한 굉장히 아쉬운 결과물이다. 모 게임 사이트에서는 <그래도 한국어로 즐길 수 있는 게 어디냐>라며 한국어로 된 것 자체에 큰 의의를 두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나라 게임계의 번역 시장은 아직도 햇병아리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향후 게임 시장이 커질수록 단순히 이해만 할 수 있을 수준의 한국어로 나타내는 것이 아닌, 전반적으로 번역의 질도 높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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