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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Aug 18. 2019

<반역>일까 <번역>일까

한국어를 무시한 부자연스러운 번역이 많아지고 있다

아마추어가 봐도 절망적인 번역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고전 자료를 제대로 읽고 그런 자료들을 쓰윽 보는 것만으로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읽어내는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자의적인 해석과 나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해 진실을 말한다. 아뇨, 저는 주로 서브컬처 자료를 사용하는데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를 주로 봐요. 이러면 나를 향하는 시선은 연구자에서 오타쿠(?)로 바뀐다. 오타쿠가 참 부정적인 의미가 되었는데, 개인적으론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브컬처 자료를 접하면서 쌓여온 지식은 나만의 강점 중 하나이기에 이걸 사용하지 않고서는 굉장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 반쯤 겉멋이 들어서 산 일본어 원서 만화나 소설이 뒤늦게 도움이 될 줄은 솔직히 꿈에서 몰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러한 말들이 과연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이 되어있을까라는, 한일 번역 대조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 다행인 것이 최근에는 한국의 게임 시장이 확대되면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그치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되는 게임도 많아지고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아마추어 번역팀이 힘을 모아 번역을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어를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내가 한국어 자막을 켜고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간혹 클리어를 한번 한 게임을 다시 할 때에는 한국어로 바꾸고 하는 경우가 있다. 제아무리 일본어가 유창하다 하더라도 모국어만큼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처참한 번역 퀄리티를 보고 다시 일본어로 바꾸어 게임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솔직하게 말해서, 최근 <번역>이라고 내놓은 것들 대부분은 인공지능이나 자동 번역이 한 수준이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만 하는 말이고 그 작품들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돈을 받고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할 지경이었다.


번역은 <모국어 지식>이 더 중요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미리 말해두겠지만, 모든 번역가분들의 작품이 그 정도 수준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실제로 나도 어떤 유명한 번역가 분과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번역에 관해서도 많이 배우고 현 번역 시장에 대한 현실도 많이 듣곤 한다. 그분도 현재 번역의 질에 깊은 우려를 표시하셨다. 그전까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번역의 <질>이라는 추상적 평가 기준에 조금씩 감을 잡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국어 실력>이 좋아야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동시에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다. 당장 번역을 하고픈 사람들을 모아보더라도 대부분은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강조하기에 바쁘지 한국어 실력을 뽐내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가 늘 보고 듣고 쓰는 말이기에 못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작품 등의 <가상>에서 쓰이는 언어 양상은 매우 다르다. 당장에 문학 작품을 보더라도, 예스러운 사람들은 <하오>로 끝나는 <하오체>를 많이 쓰지만 현실에선 보기가 매우 힘들며, 실제로 보더라도 연극을 하거나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드라마의 <부잣집 어머님>이 자주 쓰는 <감히>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만일 <감히>라는 말을 쓰면 큰 싸움이 날 가능성이 크다. <감히>에는 상대를 얕보고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함부로 쓰기도 어려울뿐더러 애초에 현실에서는 많이 쓰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드라마나 소설, 번역물에서는 심심치 않게 쓰이는 단어이다. <현실>과 <가상>의 단어나 말투 차이뿐 아니라 단어, 문법적 지식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 모든 어휘나 문장이 1:1 번역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맥에 따라 말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며, 속담이나 숙어 같은 경우 그 나라 사정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말장난일 경우 단어의 의미나 겉모습, 문맥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더욱 사정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현대에는 사전이 워낙 잘 구비되어 있으므로 모르는 외국어가 나오면 당장 뜻을 찾으면 그만이다. 번역가의 자질은, 그 단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거의 완벽한 상태로 도착 언어(번역할 언어)로 옮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고양이 손을 왜 빌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은 이미 한국어에 침투한 속담 중 하나이다. 이는 일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매우 바쁜 상태>를 가리킨다. 만일 도착 언어에 대응하거나 비슷한 속담이 아예 없다면 이것을 직역하고 그 뜻을 달아두면 되지만, 도착 언어에 비슷한 말이 있다면 그 말을 선택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지 않을까? 우리말에는 이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라는 말이 있고, 좀 더 센스 있게 바꾸려면 <눈도 코도 뜰 수가 없다>는 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일본어 표현은 그대로 직역되어 한국어 체계에 침투했고 이미 어느 정도의 의미까지 부여받은, 이른바 <외래어> 표현이 되고 있다. 보통 애니메이션에서는 저렇게 말을 하며 실제로 고양이 손이 나오는 등 말장난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번역 난이도가 훨씬 올라가겠지만, 소설에서, 만화에서, 저런 표식이 없음에도 굳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을 직역했다고 한다면, 나는 그 번역가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물론 고양이는 귀엽다. 나 역시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더 귀엽기에, 고양이가 손을 빌려준다면 기꺼이 받을 것이다.


노려진다?

<노려진다>라는 말은, 시대를 꽤 거슬러 올라가 2005년경부터 인터넷 등지에서 자주 보던 말이었다. 일본어로는 <狙われる>라는, <노리다>라는 말의 수동 표현으로 쓰이는 말이다. 즉, <노리다>라는 말은 화자가 어떤 대상을 목표로 한다 는 말이 되지만, 수동 표현이 되면 그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므로, 특정 대상이 화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말은 이러한 수동/피동 표현을 썩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나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하는 가운데 그런 표현들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일본어는 보통, 전체 문장의 주어가 일관되어 있을수록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는 <나> 혹은 <나에 속한 사람들>이 주어 측에 속하게 되며 그 외에 사람들은 <외부 사람>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주어>에 해당하는 사람이 어떠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되면 자연스럽게 수동 표현이 선택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말은, 큰 문제가 없다면, 특히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주어를 즉각 즉각 바꿈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려 나를 흠뻑 적셨고, 나는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에 흠뻑 맞아 젖었고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전자가 한국어 표현에 가깝고 후자가 일본어 표현에 가깝다. 일본어에는 <비에 맞는다>라는 말을 <雨に打たれる>와 같이 수동태로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비에 맞는 대상이, 즉 비가 영향을 주는 대상이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극히 일본스러운 표현이다.

이처럼 <노려진다>라는 말도, 이러한 문장 및 문법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1:1로 끌고 들어온, 굳이 말하자면 번역도 아닌 말투이다. 요즘은 <표적이 된>이라는 말로 많이 순화되곤 하는데, 차라리 후자가 훨씬 매끄러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수동/피동 표현은 한국어 체계에도 있지만 썩 자주 쓰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명사와 명사를 이어주는 の

일본어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반드시 조사 の(한국어의 ~의에 해당되는 조사)를 써야 한다. 만일 저 조사가 쓰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명사로 취급해도 괜찮다는 말이 되므로 상당히 어색한 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명사가 죽 이어지는 글에는 の가 대여섯 개가 들어가기도 하는데, 객관식에서 쭉 같은 번호가 답이면 불안해지고 어색해지는 것처럼 이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 일 까는 의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어는 명사와 명사를 그대로 연결해도 크게 어색한 경우가 많지 않다. 설령 <나>와 <집>을 잇는다고 하면, 한국어는 간단하게 <내 집>이라고 하면 되고, 일본어로는 꼭 の(~의)를 넣어 <나 집>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일본어 명사 사이에 있는 の 는 번역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이걸 또 굳이, 솔직하게 번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네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을 <너 일>, <당신 사정>이라는 말을 <당신 사정>이라고 나타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럴 때마다 나는 수박에 박혀있는 씨를 빼내듯, 전체 문장이나 문맥의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를 제거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바보 같은!>은 <말도 안 돼!>일 텐데?

일본 서브컬처를 많이 접해본 사람이라면 <馬鹿な!>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보거나 들을 것이다. 보통 한국어로는 <바보 같은!>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이다. <바보>를 나타내는 <馬鹿(바카)>와 <~한>이라는 문법적 요소를 덧붙여 만든 아주 솔직한 번역어이다.

보통 <믿기 어려운 상황>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감탄사가 될 정도로 말의 본래 의미와는 다소 동떨어졌다. 정말 그 상황이 바보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며 하물며 그 사람이 바보 같아서 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말로는 <말도 안 돼!>라는, 아주 적절한 번역어가 있다. 우리도 <말도 안 돼!>라는 말이 꼭 문법적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본어도 마찬가지이며, <말도 안 돼!>가 현실에서도 많이 쓰이는 것처럼 <馬鹿な!>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한다. 우리말에 이렇게 적절한 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을 보면, 그런 사항을 일일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라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진짜 <번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만, 출판사 입장에서는 보통 한두 번 번역을 맡기면 두 번 다시 연락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원고를 받은 후 검토 및 수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수한 글을 쓰는 사람을 원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 기준에조차 미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일본어 번역가들 몸값은 싸질 수밖에 없고, 그 사람들은 번역가들의 처우가 나빠지고 몸값이 싸진다며 불평을 한다.

  <번역>이란, 단순히 내용을 1:1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과 뉘앙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도와 더 나아가 캐릭터성까지 번역하는, 재창조에 가까운 작업이다. 보통 논문이나 발표를 할 때에도 자신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경우 이런 질문들이 날아온다. "이미 그와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알고 있나요? 그걸 알고 있다면 왜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는지 설명해주실래요?"

  물론 이러한 과정이 한국어 말투나 어휘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는 이러한 지적을 <배부른 소리>로 취급한다. 아예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보다 일단 말이라도 통하는 한국어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지덕지다, 라는 논리이다. 그것은, 배가 고픈데 맛을 따질게 뭐가 있냐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의 번역 시장은 불모지가 아니다. 일단 번역의 질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일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번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마이너스 이미지가 붙어버렸고, 번역가는 늘어나지만 전체 질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추후 인공지능에 대체될 직업에 <번역가>가 포함되었다. 그만큼 현재 인공지능의 번역 알고리즘은 상당한 수준에 달하고 있다. 이 말인즉슨, 저런 기계적인 1:1 번역을 고집하는 자칭 <번역가>들은 기계들과의 경쟁에서 당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계를 뛰어넘어, 즉 단순한 1:1 번역을 뛰어넘어 문맥을 파악하고 문화에 적절하게 끼워 맞추는 재창조 알고리즘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가 <I love you>라는 말을 번역할 때, 직접적인 감정 표현이 당시 일본인들의 감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판단하여 그 소설 문맥과 분위기를 살려 <달이 아름답군요>라고 바꾼 일화는 꽤나 유명하다.

  번역이 주 연구 분야도 아닐뿐더러 한국어 지식도 매우 얕은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주제넘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따금 초벌 번역을 맡게 되면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한 번은 일본 고전 시가 포함된 에세이를 번역했는데, 그 작업에만 거진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일본 고전 시 형식을 그대로 옮겨도 되는지 아니면 한시 형식으로 바꿔야 하는지, 일본 고전 시에는 각 계절이나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어떤 단어를 통해 나타내야 할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 결국 그 책은 발매되지 않았지만, 덕분에 일본 고전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번역>은 생각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직역>과 <번역>을 구분하고 자신의 수준을 자각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번역가>로써 인정받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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