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지 열흘 정도 되었을 때쯤이다. 나름 '무계획' 한 달 살기를 표방하며 매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오사카에 왔지만, 열흘 동안 딱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다. 나름 재미있게, 또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무언가 약간은 심심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가던 곳은 난바나 우메다 정도였고 일반적인 3박 4일 또는 4박 5일 오사카 여행을 한 달로 쭈욱 늘린 듯 크게 다를 것 없는 오사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한 주를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을 맞이하며, 늘 가던 곳이 아닌 새로운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네 동네가 있던 숙소는 비교적 오사카의 남쪽 지역이었기에 구글 지도에서 오사카의 북쪽 지역을 여기저기 뒤져 보았다. '반파쿠기넨코엔'이라는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만박기념공원', 즉 '만국박람회 기념공원'의 줄임말이다. 무려 50년도 전인 1970년에 개최되었던 '일본 만국박람회'가 진행된 곳이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살펴보니 서울의 서울숲이나 올림픽 공원 정도의 상당한 규모였다. 그래, 안 그래도 공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이 생기는 장소였다. 그렇게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반파쿠기넨코엔은 오사카 모노레일 '반파쿠기넨코엔 역'에서 내리면 바로 위치하고 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저 멀리 바로 보이는 것은 이 공원의 상징과도 같은 약간은 기괴한 모습의 '태양의 탑'이다. 태양의 탑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보이는 공원의 모습은 뭔가 내 스타일일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원래는 가볍게 보고 가려했는데 공원의 전경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맛있는 간식과 음료수를 마시며 최소한 오전 시간은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근처의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음료수를 한 병 샀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생크림 카스텔라도 함께 먹고 싶었지만 그 편의점에는 없었다.
월요일 오전 10시의 공원은 정말로 한적했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마주친 사람들이 한 열 팀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넓디넓은 정원을 나 혼자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내 집 앞마당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산과 바다와 같은 자연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유유자적 살아가는 자연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심경이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넓고 좋은 자연을 여유롭게 쓸 수 있는데 나는 무엇하러 그렇게 작은 집 하나 좋은 곳에 구하겠다며 아등바등 살았나.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공짜가 많다. 공기도 공짜, 자연을 누리는 것도 공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도 모두 공짜다. 이래서 여행을 해야 하고 자연을 만나야 하는구나. 새삼 이번 한 달 살기의 의미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 남자의 미니멀라이프>의 저자인 조슈아 필즈 밀번(Joshua Fields Millburn)은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모두 공짜"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일몰을 보는 시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시간, 좋은 책을 읽는 시간 등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모두 공짜거나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도심이나 공원이나 한강에서 서로 싸 온 도시락을 나눠 먹거나 둘레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 족하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 탁진현 <가장 단순한 것의 힘> 中
공원을 걷다가 보이는 아무 벤치에 누워 잠시 잠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 그런지 잠은 오지 않았지만 문득 내가 지상낙원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에 무성한 나무가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 주고 그 나뭇잎 사이로 적당한 햇빛이 얼굴을 비춘다. 간간히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서 아이들 몇몇과 아이들의 부모가 함께소리를 지르며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지만 전혀 소음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디선가는 공사도 진행하는지 계속해서 드릴 소리가 나지만 그조차도 아름답다. 가져온 백팩을 베개 삼고 나무를 그늘 삼아 벤치에 누워 있는 내 모습에 새삼 웃음이 났다. 나 지금 행복하구나.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누워 있었다. 잠에 들지는 않았지만 잠을 잔 것 같은 개운함마저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까지 꽤나 멀기도 하고 전철도 몇 번 갈아타면서 다음에 올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래서 꽤나 피곤했는데 그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시 일어나 공원을 걸었다. 내가 가는 길 주변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점점 노래를 크게 불렀다. 발걸음도 가볍다 못해 점점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내가 이렇게나 신난 적이 있었나. 이 자연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에게 취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감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이래서 가장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곳에 오니 아무 눈치도 안 보고 그나마 지나다니는 사람들조차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진짜 나다운 모습을 내가 발견한 것 같은 느낌.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곳에서 마음껏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걷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보였다. 튤립 정원이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다가 봤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튤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포카메라를 가져와서 튤립 사진과 튤립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함께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기한 것은 이곳에서도 역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대포카메라를 열심히 찍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월요일 오전이라 더욱 그렇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암묵적인 피사체가 되고 또 촬영자가 되어 그렇게 튤립과 공원과 서로의 모습을 연신 찍어댔다.
갑자기 저쪽에서 열차 소리가 들려온다. 공원 내부를 순환하는 맹꽁이 열차였다. 갑자기 사진을 찍던 사람들 중 한 열 명이 우르르 몰려가 그 열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순간 포착한 사진에 대한 욕심이 있으시구나. 사진 찍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비슷한가 보다. 그분들을 보며 나도 사진 찍는 데에 많은 참고를 했다. 그분들이 공들여 찍는 사진 스폿에서 나도 따라 찍으면 꽤 근사한 사진이 나오고는 했다. 그 열정을 배우기도 했다.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계속해서 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또 쫓아가는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내가 무언가에 몰입해서 저렇게 열심히 해본 일이 마지막으로 언제일까. 내 삶에도 앞으로 저렇게 몰입하는 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공원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 주 주말 친구 B에게 "내가 정말 기가 막힌 공원을 하나 알았는데 같이 가자"라고 말했다. 친구는 당연히 오케이.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갔다. 공원에 가기 전 근처의 슈퍼마켓에 들러 이것저것 간식을 사갔다. 김밥, 타코야끼, 가라아게, 멜론, 그리고 여기 처음 온 날 정말 먹고 싶었던 생크림 카스텔라까지 말이다. 맥주 한 캔과 콜라 한 병, 그리고 돗자리도 준비했다. 완벽한 피크닉 준비를 하고는 공원에 가서 이번엔 곧장 튤립 정원 쪽으로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이번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이미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 사이로 튤립이 잘 보이는 한 곳에 우리도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친구와 함께 온 피크닉은 그 나름대로 또 재밌었다. 아니, 지난번에는 간식이 없어서 조금 썰렁하고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이 좋은 자연 아래에서 마음껏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지난번에는 혼자 돌아다니느라 조금은 쓸쓸하고 아쉬웠던 마음도 채워졌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사카에 오고 나서 열흘 동안 너의 도움을 줄곧 받아 왔는데, 이곳은 처음으로 너의 도움 없이 나 혼자 온전히 오사카를 개척해서 알게 된 곳 같아. 그리고 너의 도움을 받던 내가 너에게 내가 알게 된 장소를 소개해줄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해!"
친구는 안 그래도 지난 열흘 동안은 막연히 나를 오라고는 했지만 재밌게 잘 보내고 있는 것인지 내심 궁금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놓인다며, 이제는 나 혼자서도 오사카에서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그런 기분이었다. 막연했던 나의 오사카 한 달 살기는 이 공원을 기점으로 방향이 잡혔고 내가 한 달 동안 오사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하루하루 보내면 될지 확신이 생겼다. 여전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이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진짜 현지인들이 즐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고 난바나 우메다 외에도 갈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공원을 나오는 길에는 '태양의 탑'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지난번에는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고작 두 번 봤다고 괜히 정감이 간다. 만화 <20세기 소년>과 극장판 짱구 <어른 제국의 역습>에도 나왔고, 아이묭이라는 가수의 <Tower of the Sun>이라는 노래도 있을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그런 태양의 탑이기도 하다. 비록 한 달 살이 여행객이지만 일본인들의 정서에 조금씩 공감하는 부분이 생겨간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3주 정도 남은 앞으로의 오사카 생활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이 날의 일정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