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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뚝 Aug 27. 2021

나도 밥 좀 먹자

자매품: 나도 잠 좀 자자

"나는 도대체 누가 돌봐주는 거야..!".


턱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통영의 어느 펜션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렸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 봐 속으로 끅끅 삼키던 눈물이, 그동안 삼키고 삼켜 참아왔던 울음이 차오르고 차오르다 한꺼번에 터져버리니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얼굴이 반쯤 잠겨 갈 때쯤 남편이 달려왔다.


"미안해 여보, 미안해 정말.."


나지막한 목소리로 미안하다 얘기하는 남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더 남은 눈물을 다 비워내고 나서야 입을 뗐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 나도 일하고, 그러면서 나는 챙길 것도 다 챙기는데, 왜 이렇게 나만 힘들어야 돼?"



지난여름의 초입에 우리 세 가족은 야심 차게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무려 통영. 마스크를 거부하는 16개월의 작은 아기를 데리고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두 달이 넘는 출장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또 몇 달 동안 해외출장을 나갈 남편과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자며 오붓하게 3-4일 떠나보기로 했었다. 원래도 출장이 잦은 남편이었지만,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는 잠시 발이 묶여있다가 더는 지체 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밀려 야근에 밀려, 다시 출장이 시작되었다. 워낙에 출장이 잦은 일이라 코로나가 있기 전에도 보통 한 달에 반 정도는 해외에 있었다. 이번에 가면 지난번보다도 긴 장기출장으로 격리까지 하면 거진 4개월을 떨어져 있게 되니 가기 전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보자 싶어 나도 남편도 휴가를 맞췄더랬다.


아이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집 한 채를 들어 옮겼다 싶을 만큼 있는 대로 짐을 챙겼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챙기자니 짐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기저귀, 여벌 옷, 수영복, 이유식, 아기간식, 휴대용 포트, 상비약, 장난감, 사운드북, 주전부리 등등 챙겨도 챙겨도 끝없이 챙길게 많았다. 아이 챙기랴, 숙소 찾으랴, 아기 짐 챙기랴, 간식 챙기랴 그리고 내 짐 챙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작은 좋았다. 혹시 몰라 중간에 무주에 한번 들렸다 하룻밤을 자고 갔는데 긴장한 엄마 아빠 마음을 알았는지 기특한 울애기는 가는 내내 통잠을 자주 었다.


오- 이 정도면 할만한데?


그렇지만 늘 방심은 금물이다. 일부러 낮잠시간을 맞추어 출발했는데도, 1시간쯤 지났을 까 금방 깨버린 아이는 카시트가 답답했는지 온몸을 비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노래도 불러보고, 춤도 춰보고 과자도 줘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카시트에서 꺼내서 품에 안았다. 계속해서 떼를 쓰고 울어대던 아이가 조금은 잠잠해지더니만 이내 또 잠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 사진도 찾아보고, 블로그에 후기도 부지런히 뒤져가면서 찾은 곳이라 기대를 많이 했다. 고르고 골랐는데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였던 곳이 와보니 어린 아기가 다니기에는 곳곳이 위험 투성이었다. 침대 위 한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미끄럼틀은 어른인 내가 타기에도  가파른 경사에 도저히 태울 수가 없었고, 아늑하게 보였던 방의 바닥은 온통 대리석으로 마감이 되어있어 행여나 아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펜션은 독채라서 좋았지만 3층까지의 계단의 경사가 아이에게는 너무도 가파랐고, 자꾸만 계단 난간을 잡고 올라서는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우리 부부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혹시라도 한눈을 팔다가 지난번처럼 다칠까 싶어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분명히 쉬러 왔는데 쉴틈이 전혀 없었다. 아이 잡으러 다니랴, 짐 정리하랴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러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3층에 마련된 수영장으로 아이를 안고 올라가서 잠깐은 정말 재밌게 놀았다. 그래도 1시간은 같이 놀 줄 알았는데, 정작 물속에서는 30분도 못 있고 다시 내려왔다.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검색해서 사간 뽀로로 튜브에 그렇게 빨리 호기심이 사라질 줄 미처 몰랐다. 자꾸만 나오겠다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 씻기고 옷을 입히려는데 남편이 말했다.


"회사 전화 좀 받고 올게"


기저귀를 차지 않겠다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겨우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혔다. 옷가지를 정리해야 하는데, 아이는 그새 식탁 의자에 가있다.


"거기 올라가면 위험해 아가!"


이제는 안기면 정말이지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아이를 한 손으로 번쩍 치켜 안고 로션이며 옷가지를 정리하고 이유식을 데웠다. 식사시간은 왜 이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로망에 가득 찼던 펜션은 그야말로 한 끼 챙겨 먹는 게 '일'이 되어버렸다.


안에서도 그랬지만 밖에서 밥이라도 먹을라 치면 아기의자에서 채 5분도 있어주지 않는 아이를 이리저리 애써가며 밥을 먹이느라 혼이나 갔다. 셋이 함께 식사는 불가능했기에, 한 명이라도 빨리 먼저 먹고 교대를 해주어야 다른 한 명이 온전히 밥알을 삼킬 수 있었다. 남편이 그래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니까, 내가 먼저 아기를 먹이면 그 사이에 남편이 밥을 먹고, 내가 밥을 먹을 동안 남편이 아이를 먹이거나 하는 식으로 했었다.


휴가였지만, 업무전화를 거절할 수 없었던 남편이 한 번씩 전화를 하거나 전화하러 밖으로 잠깐 나갈 때면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먹이는 것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통화는 짧으면 10분 만에 끝나기도 하고, 30분이 될 때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김이 모락모락 나던 갓 지은 밥도, 보글보글 끓어 나오던 찌개도 식어갔다.


"네, 부장님 네네 자료 보내드릴게요. 네네"


전화기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로는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고 있는 남편은 나와는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분명 한 테이블에 있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만지려는 아이를 제지하면서 동시에 밥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는데 통화는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다.


"나도 밥 좀 먹자."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그날 밤도 그랬다. 이틀 내내 아이가 깊이 자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잠에서 깼다. 침대는 도저히 위험해서 아이를 데리고는 잘 수가 없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지친 남편이라도 편히 자게 하고 싶어 내가 바닥에서 아이를 데리고 잤는데, 자꾸만 깨는 아이를 재우느라  거의 잠을 못 잤다. 이틀 연속 그렇게 잠을 설치고 보니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동안 남편은 업무연락을 계속 받았고, 메일을 보내고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에 혼자 맡고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휴가까지 와서 업무 연락을 받는 게 안쓰럽기도 하다가, 정말 3개월 정도를 떨어져 있다 모처럼 나왔는데 너무 한다는 생각에  회사 욕도 한 바가지 해줬다가 분명 휴가라고 왔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점점 뾰족해져 갔다.


 "중요한 콜이 있어서, 잠깐만 받고 올게"


턱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터뜨린 건 한바탕 혼이 나간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펜션 마당에 달빛 조명으로 된 포토스폿이 있어서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가족사진 한 장 남겨보자 남편과 이미 얘기한 터였다. 해가 지고 아이가 잠에 들기 전에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될 일이었다. 그저 밤마실 한 번만 나갔다 오는 게 그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이 한 시간에 가까워질 무렵 아이는 놀다가 우유를 먹고 잠에 들에 들었다.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안고 펜션 방안을 서성이다가 저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튀어올랐다.

남편에게 속사포처럼 카톡을 보내고, 그 길로 욕실에 들어가 주저앉았다.


복직한 지 1년을 한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워낙에도 휴직 전에 이직을 해던 터라 복직해서도 더 빨리 적응하려고 더 열심히 일했다. 퇴근길에는 언제나 진이 빠져있었고, 퇴근해서도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들었고, 아이가 행여라도 깨면 다시 재우느라 늘 잠은 부족했다. 야근이 잦은 남편이 안쓰러워 주말에는 조금이라도 더 자게 두고 되도록 내가 먼저 일어나서 아이를 봤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일도 다시 손에 익고 점점 나아지는 것 같은데  정신없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나는 자꾸만 멍해졌고,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소리 내서 펑펑 울어버리고 털어버렸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울보라고 자부하던 내가  눈물조차 잘 흐르지 않아 차라리 펑펑 울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럴까, 그즈음의 일기를 들춰보니 부쩍 '울고 싶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울고 싶으면 울면 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았다. 혼자 있을 딸과 손자를 봐주시러 오는 엄마가 계셨고, 나도 이제는 우리 아이의 엄마니까, 이제는 엄마를 돌봐드려야 하는 나이의 딸이니까, 그리고 아내니까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그저 나로서만 오롯이 존재했던 나날과는 확실히 달라진 존재의 무게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면서 '약해지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와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괜찮다고 하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그러고 나면 그동안 쌓아 올린 것이 다시금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그저 하루를 다시 쌓고 또다시 쌓아왔다.


그렇게 쌓아오는 날을 지나오는 동안 아이는 매일매일이 다르게 커있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집안은 집안대로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챙기느라 늘 나는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 흩뿌리게 적어둔 메모지를 한데 모아 다이어리 뒷면에 붙여도 보고, To do list를 적어도 보고, 냉장고 옆에 화이트보드를 붙여서 필요한 물건이 생겨날 때마다 적어두기도 했다. 그래도 늘 무언가가 부족했고 어찌나 빨리 떨어지는지 늘 내 손가락은 분주했다. 때에 맞추어 접종을 하고, 병원에 데려가고, 약을 먹이고 이유식을 주문하고 장난감을 사주고 책을 주문하고 아이에 관련된 것은 모조리 내 몫이었다. 집 앞에 쌓여가는 택배들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또 주문을 하고, 정리를 하고 그러는 동안 내가 쓰는 화장솜은 몇 번이고 떨어지고, 로션도 스킨도 그전에는 떨어지는 일이 없던 것들이 차츰차츰 뒷전이 되었다.


결혼 전에,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남자 과장님 하나가 나랑 동갑인 본인 와이프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결혼하면 이제 본인 화장품도 제대로 못 사는 거 알지?"


나는 이 말이 참 싫었다. 아니 왜 내 화장품을 내 마음대로 못 사는지, 그게 결혼하고 애 낳는 거랑 대관절 무슨 상관이길래 그런가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그 '화장품도 제대로 못 사는 사람' 이 되어있었다. 안 사는 게 아니고 못 사는 게 맞았고 그 정도로 나를 미처 챙길 겨를이 없다는 말이었다.


주중에는 그나마 친정엄마가  와계시지만 주말이면 오롯이 나 혼자의 몫이었다.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 시간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 남편도 남편대로 해외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일도 하고, 집도 챙기고 주말은 아이를 보느라 나를 돌볼 시간이 정말이지 부족하고 또 부족하게 느껴졌다. 나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도 있을 테지만, 그냥 내가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힘들었다. 힘든데 힘들다고 말하면 정말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더 안 힘든 척을 했다.


그날 그렇게 내가 펑펑 눈물이 났던 것도 고작 밥을 못 먹어서, 잠을 잘 못 자서가 아니었다.  

비행기에서도 산소마스크는 어른이 먼저 쓰고 아이를 챙겨줘야 한다고 했다. 내 안전이 확보되어야 다른 사람도 구할 수 있는 거라고. 나를 나대로 위해주고 제일 먼저 챙겨줘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이건 신경이건 쏟을 수 있었는데, 그동안은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나를 늘 뒷전에 두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고 그 익숙해져 가는 것에 스스로 서운해지고, 그 서운함이 되어 쌓이고 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서운함에 피곤함이 겹치고, 또 그 피곤함에 이제는 억울함까지 생겨나서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 같다.


흐느껴 우는 나를 바라보면서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도 본인 나름대로 힘들었을 텐데, 엉엉 울어버리는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늘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었는데 가시 돋친 나를 받아주면서 본인도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까. 서로에게 모두 소중한 아이이고, 나에게나 아이에게나 남편도 남편대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갇여 있던 마음을 눈물로 흘려버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좀 더 신경 쓰고 노력을 하겠노라고 얘기하는 남편의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그날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과 아이가 잠들고 난 뒤, 혼자 가만히 스탠드를 켜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남편이랑 나눠마시려고 가져온 와인을 한잔 따라서 눈앞에 두고 일기를 썼다. 금새 비어있던 마음이 조금 또 채워졌다. 이렇게 하면 될일인데, 나를 조금 더 챙겨주면 될일이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한번 이제는 이렇게 까지 쌓여서 가슴이 막혀버리기 전에 그전에 아이도 남편도 부모님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한 와인한잔, 나를 위한 책 한페이지, 나를 위한 따순 밥, 나를 위한 무언가를 앞으로도 챙겨보리라 다짐했다. 



보통 30대에 임신, 출산, 유아기 육아가 일어난다고 치면, 커리어에서는 이제 막 일에 감이 잡혀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뒤죽박죽되어 버린다. 그 기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최대한 힘을 비축하고, 정신줄 붙잡고, 우선순위에 항상'나'를 놓고, 그기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거다.

지나간다. 거짓말처럼 지나간다.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터널이지만 끝이 있는 터널이다. 끝이 있는 터널은 걷다 보면 언젠가는 지나기 마련이다.


- 생각이 많은 서른 살에게/김은주 著 /워킹맘에게 해주고 싶은 말 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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