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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Jan 05. 2021

때를 놓쳐버린 삶

♪IDIOTAPE - Too Old to Die Young


♪IDIOTAPE - Too Old to Die Young


인생은 타이밍, 혹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내게 있어선 어떤 것이 있을까. 아, 비트코인을 백만 단위일 때 샀던 경험이 있다. 지금은 주머니에 없고, 지금의 비트코인은 나에게 있어 한낱 그래프가 되었다. 이렇듯 타이밍은 보통 결과론이다. 그때는 올라도 공포, 떨어져도 공포였던 때였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맘 졸일 일 많아 그땐 적당한 때 내렸고 비싼 술값 정도 벌었더랬다. 그때의 선택은 후회가 되지 않지만, 지금은 그 선택이 우습게도 후회가 되어버리는 그런 것이라고 배웠다. 


비슷한 개념으로, 인생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때를 놓치면 여지없이 인생은 나에게서 떠나간다. 심지어 이 인생이라는 것은 이때를 게임처럼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 탓에, 살아오며 놓친 때가 몇 개인지도, 그렇게 흘려버린 내 인생도 얼마인지 셀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내 손에 쥐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인지 도통 모른 채로 지낸다. 






요절한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극단적인 때와,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쓰고 있는 다른 필명의 주인은 그들의 나이 20살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하였고, 지금 쓰고 있는 필명의 주인 역시 21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작년, 가장 빠져들었던 작가 역시 36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적어도 내가 글의 중간중간 타인의 유작으로 풀어내는 기분이 일종의 패션이나, 글 따위를 써 내려가기 위한 꾸밈 따위가 아님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한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지내온 것뿐이다.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아직까지 남을 예술작을 남겼고, 또 그들의 이름을 남겼다. 인터넷도 변변찮은 시절, 바다 건너의 나는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을 빌려 어두운 무언가를 써내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이름 조차 스스로 지을 수 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당신의 유작이나 과거의 작품들이 이렇게 퍼질 것을 알았냐고. 알았다면 삶을 선택했을 거냐 물어보고 싶다.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들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젠 없는 그들을 원망한다. 그들은 때를 잘못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랬으면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그들에게는 그런 선택지 따윈 없었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들의 유작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느껴왔다. 그들의 삶의 밀도와 무게는 생을 이겨내기 묵직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온전히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 나의 삶은 그 무게에 눌려 한 없이 가벼워지고, 한 없이 텅 비어 가는 기분이다. 






나는 아무래도 선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선택할 것이 없는 사람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을 했다. 이미 너무 빌려 쓴 탓에 바꾸기엔 어색하기 그지없이 그들의 이름을 달고, 그들처럼 내 몸 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도통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무엇을 하려고 애쓸 때마다 흘러가고, 흩어지고, 이내 사라지는 것들을 보았고, 그렇게 삶은 지나간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마저도 무서워진다. 그런 나에게 힘을 내라거나, 분노하지 말라거나, 다시 시도하고, 증명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내는 것일지 궁금하고 부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들에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도 모른 채 살아져 버렸는데. 어제와 오늘은 문득 깨달은 과거의 순간을 한껏 원망했다. 그때의 미래가 된 어제와 오늘은 그런 하루였다. 떠올려보면 과거의 그 순간에는 뿌듯했고, 이 것이 맞다며 타인과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선택할 것이 없는 삶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원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비트코인을 샀을 때와, 팔았을 때과, 지금의 관계와 닮았다. 내 삶의 대부분은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이런 글 밖에는 없다. 이 생 마저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희망일지, 이 생을 가라앉혀 끝내 생을 끝내는 선택을 스스로 부추기는 절망 일지는 알 길은 없다. 그저, 지금 이 글자를 쓰는 순간만큼은 살아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이 글자가 끝나면 그것마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그런 때에는' 뭐라도 쓰려고 한다. 


새해의 희망찬 한 줄로 "아무래도 좋아요."라고 답했다. 좋아요는 긍정의 단어이지 않나. 작년에는 '그저 살아남기' 였더랬다. 재작년도 그렇다. 안타깝다며, 환갑이 넘은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화를 냈다거나, 누군가를 원망했다던가 그런 불효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이고 원인인 것인 것은 알았다. 글의 바깥으로는 편린이라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의지와는 다르게 튀어나와버린 탓이다. 그런 사람이다 나는. 아, 자책하며 죽기엔 너무 늦어버린 삶이다. ( Too Old to Die Young ) 그들의 이름은 빌려 쓰지만, 그들처럼 이 글은 작품이 아니고, 앞으로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선택지는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쓰는  비겁한 글이다. 비겁하면 어떠랴, 또 쓸 수 있기를 스스로 기대할 수밖에 없다. 선택할 것이 없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무어라도 선택해야 하고, 이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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