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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애 Aug 18. 2021

나의 이중생활이 끝나간다

끝까지 가보았더니 새로운 시작이었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살아온지 햇수로 7년째.

작업실에서 잠시 산책하고 들어와 가볍게 샤워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채로 몸과 머리를 말리며 상쾌함을 느끼다 급작스레 눈물이 나온다. 

나만의 공간이 사라진다니, 나의 이중생활이 곧 끝을 맞이한다 눈물이 나왔다.    


 



내가 집을 뛰쳐 나온건 2015년이다.

생계를 위해,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돈을 더 벌어야 했고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38살에 작업실을 얻었다.

나에겐 살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표현하고, 시간이 지나 복잡한 일들이 마무리되고나서 ‘나 그때 집 나왔자나~’이렇게 이야기하면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해야 갈 수 있는 곳, 5층 건물의 옥탑방이 나의 첫 작업실이었다. 12평정도 되는 옥탑방이었고 성에가 잔뜩끼는 미니 냉장고랑 6kg 짜리 드럼 세탁기, 누런 벽걸이 에어컨까지 있는 풀옵션 옥탑방이었다. 중고 가구점에가서 5천원짜리 의자, 만원자리 테이블 사고 다이소에서 물컵이랑 씨리얼 그릇, 수저 두세트 정도 구비해두곤 맨 바닥에서 잠자며 글쓰며 나의 첫 독립 생활을 시작했었다.

옥탑이니까 옥상에 이불을 널고, 이동식 테이블을 구해다 놓고 글쓰는 것을 꿈꿨건만 건물 사람들이 죄다 옥상에 올라와서 담배를 피우고 덩치큰 야생 바선생이 너무 많이 출몰하는 바람에 계약 기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1년 6개월만에 나오게 되었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만큼은 난 살림과 육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게으르고 지저분한 전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되는 점, 빚에 대한 압박과 현실의 우울함을 잠시 벗어두고 내 일에 온전히 집중할 할 수 있어 작업실에서의 생활은 초라했어도 여유로웠다.     


첫 작업실은 집과 거리가 있는 곳이었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 굳이 내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온 몇 지인을 제외하곤 개인적인 부분들에 대해선 함구했다.

일회성으로 업무 미팅하는 사람들이나 교육생들에게는 나이를 속이기도 했다.

일 하는 여성들은 많지만 혼자서 영업하고 실무도 처리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 여자가 왜 일을 하는지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인지 모르겠으나 나이는 몇이냐, 결혼했냐, 애들은 몇이고 몇 살이냐, 돈 많이 버냐, 남편은 뭐하냐.. 그러다가 오버하는 몇몇 이들은 남편이 좋겠다고 한다. 와이프가 나가서 돈 번다고까지 선 넘는 말들을 해 댔다. 

치근덕거리는 인간들까지 생기니 불쾌하던 시점, 다가오는 더위로 바선생을 다시 만날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전문성을 키우고자 그간 거래하던 거래처 하나 둘 정리했고, 더는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믿고 나하고만 쭉 업무를 진행하는 회사하고만 일하기로 작정하고 바 선생이 나오는 작업실 환경을 개선할 생각으로 집이랑 10분 정도 거리에있는 4.8평짜리 신축 오피스텔로 두 번째 작업실을 얻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10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곳이라 아이들을 케어해야할 급한 일이 생기면 금방 이동할수 있는 거리였고 신축 오피스텔에 관리가 잘 되고 있는터라 바선생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첫 작업실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일을 한 덕에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전 남편이 내 카드로 만들어놓은 수천만 원의 빚을 청산했고 이혼을 준비했으며 새 작업실에 도착한지 한 달 정도 지나 이혼이 마무리되었다.

첫 작업실에 머무르는 1년 9개월 동안 김밥 한 줄 사서 운동할겸 걸으며 먹고, 술이 마시고 싶을 땐 캔보다 조금 저렴한 병맥주 사서 걸으며 마시고 그러면서 내 일인 글 쓰기로 밤을 지새운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

이혼을 진작부터 원했지만 혼자서 아이들 키우며 일해서 생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빚까지 갚아야 한다는 것이 체력적으로 용기 나지 않았다. 내가 일에 열중하는 동안 전남편에게 아이들을 챙기게 했다. 그는 일을 하지 않는 자발적 백수였으니 시간은 많았다. 어차피 숨 쉬며 사는 것 최소 2년만 자기 자식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숨쉬며 살아주길 기도하며 열심히 일했다. 내가 열심히 빚을 갚는 동안 아이들은 일주일에 절반은 내가,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가 챙겨주는 식사를 하고 옷을 입었다. 아이들한테는 참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없을 때 그저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쉴 뿐이었기에 아이들은 많이 아팠다. 몸도 마음도 모두 말이다. 그도 나름 한다고 했겠지만 어쩌랴... 아이들은 많이 맞았고 배탈이 났으며 지각하고 괴로웠던 것을.      


일하다 집에 가면 속 터지고,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해둔 음식은 그대로이고... 내가 없을 때 집은 멈추어버렸었다. 하루 밤새고 들어와 하루 청소와 음식, 아이들 학교 과제 챙기기 등... 몰아서 살림해 놓고 또 다시 내 공간인 작업실로 이동해 밤새는 것이 일상이었고 작업실에만 오면 한편으론 엄청난 해방감을 또 한 편으론 아이들이 너무 걱정되었다.     


두 번째 작업실로 옮기며 일을 줄였으니 시간이 조금 더 생겼고 덕분에 내 또래 사람들은 하지 않는 게임을 해보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코인 노래방에서 천원에 3곡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작은 평수의 룸이니 전기세 걱정 덜어놓고 한여름 에어컨을 켜 놓고 잠자는 호사도 누렸었다.



두번째 작업실 이사하는 날


계약기간 딱 1년을 채우고 나서, 집에서 20분 정도 거리의 다가구 주택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유는 매달 나가는 월세와 관리비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나의 세 번째 이중생활을 있게 한 작업실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작은 주택단지인데 동네 곳곳에 녹지가 많아 이곳에 오면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맑은 공기 마시며 산책할 수 있고 시끄러운 소음, 복잡한 것 하나 없는 조용한 동네여서 참 좋았다. 앞으로 많이 많이 그리워할 곳이다.


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가장 큰 집에 살아본 경험이기도 했다.

무려 방 3개에 화장실 2개! 하지만 서울이 아니기에 굉장히 저렴했다.     

지금도 나는 집에 서랍장이 없다. 집이 너무 협소해서 서랍 놓을 자리가 없기 때문.

방문, 장롱문, 씽크대 서랍... 무엇이던 열리는 것은 활짝 열 수가 없다. 걸리는게 많아서.

하지만 새로운 작업실은 정말 넓었다. (내 기준에서)

난 이케아에서 두 통짜리 장롱을 샀고 옷걸이에 내 원피스를 걸어 넣었다. 5단 서랍을 사서 맨 윗 칸은 속옷을 넣고 두 번째 칸은 실내에서 입는 옷을 넣는 등... 평범하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았다.

좁은 공간에서 공부하고 놀이하는 아이들 생각이 났지만 넓은 공간에 그럴듯한 나만의 은신처가 있어 기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완벽하게 이중적인 생활이었으며 내 마음도 이중적이었다.

스탠드도 하나 샀고 전신거울도 놓았다. 에이스 침대 매트리스도 샀다. 다이소에서 밥그릇, 국그릇, 파스타 그릇도 샀다.

집에서라면 반찬에 찌개 끓여 식사를 하지만 내 공간에서는 내가 먹고픈데로 간단하게 차려먹는 것도 참 좋았다.     



거실에 커다란 테이블을 놓고 노트북으로 글을 썼고, 방 하나엔 또 다른 큰 테이블을 놓고 작업을 위한 데스크탑도 놓았다. 유튜브 보면서 연습하려고 우쿠렐레도 샀다.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가 붓는 나를 위해 빈백도 샀다.


그러면서 세 번째 작업실에서 3년이 조금 넘게 흘렀다.

나를 힘들게 하는 큰 사건이 있었지만 잘 극복했고 아이들도 다친 마음이 많이 치료되었으며 이제 우린 제법 안정적이고 행복하다.

엄마가 하는 일에 대해 몇 년새 자란 아이들은 이해하기 시작했고 응원해주기 시작했다.

집을 나갔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이, 돈이, 삶의 변화가 절실했던 나는 세 번의 작업실을 거치면서 일을 탄탄히하였고 빚을 어느정도 해결했으며 아이들과 행복해졌다. 나의 엄마가 칭찬해줄 정도로.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해야할 때. 여태까지는 밑 빠진 독 메꾸고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독을 채우며 살아야할 때라 생각했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나의 노후를 설계하고자 작업실을 정리하기로 했다.        


숲세권 작업실이라 현관 열고 서른 걸음 정도 걸으면 이런 꽃은 쉽게 만난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을 정리한다 생각하니 몇 년 전 내깐에는 대단한 각오로 시작한 나의 한 시대가 끝나는 것 같아 마음을 추스르는게 쉽지 않다.

집에서는 이혼 후 연락을 끊은 전남편과 양육비 분쟁하는 아들 둘을 둔 엄마이자 주부이지만 작업실에서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인간일 수 있는 이중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 작업실이라는 공간인데 이걸 정리하자니 눈물이 나는 것이다.    

 

그간 아등바등하며 작업실 전세 대출금을 갚아왔다.

많이 이기적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독립할 때 얼마씩 돈을 쥐어주는 대신 나의 노후를 준비하기로 했고 큰 돈은 아니어도 나는 그 돈을 나의 노후를 위해 안전한 곳에 묶어 두기로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작업실 공간은 지하철 6정거장 거리의 나의 엄마 집 방 한 켠에 만들어 두고 작업실 생활비를 줄여 저축을 더 하기로 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정도 해결했으니 이제 실천 사항들을 수정해야했고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건데, 머리와 마음은 다른건지 막상 내가 온전히 나로서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니 앞으로는 어디서 답답함을 풀고 잠시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계약 기간이 끝난게 아니라서 새로운 새입자가 구해질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때까지 작업실에 갈 때마다 여행하는 느낌으로 살 생각이다.

작업실에서 샤워하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을테다.

밥 먹으면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을 것이고 씽크대에서 양치질 할꺼다. 좋아하는 음악도 계속 틀어놔야지.

많이 그리울 것이다. 나의 이중생활이.

많이 그리울 정도로 소중했고 나에게 성장을 가져다 주었고 내 삶을 변화시켜준 작업실이라는 공간.

이제 새로운 인생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이중 생활을 곧 끝낼 참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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