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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pr 02. 2023

시를 읽는 밤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다정하게 부르고 싶어서



                         김경인

 

더는 찢을 수 없이 잘게 찢어진 종이 조각처럼

피를 더럽히며 나는 무럭무럭 자란다


선명한 글자들로만 적힌 서랍 속 일기장이 물었다

너는 누구의 필체로 쓰인 이름이지?


서랍에는 내가 버린 목소리들

혹은 소리 없이 커지는 소문들


아니 그건 어쩌면

가판대 위 인조 실크 스카프 쓰다듬는 눈먼 늙은 여자의 튼 손

부드러운 팝콘 속 부서지지 않은 탄 옥수수 알갱이

모퉁이를 돌 때 저멀리 남아 있는 그림자의 분명한 색깔


나는 원한다, 납작해진 털가죽 사이로 삐져나온 개의 따끈한 내장과도 같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비릿한 문장을


끓는 솥 위로 속수무책 둥둥 떠오르는 찹쌀 알갱이같이

출렁이는 단물 위의 거품과도 같이

설탕물에 빠져 죽은 하루살이 날개와도 같이

혼자 요동치는 수술대 위의 폐와도 같이


나를 돌아 나온 피가 잠깐 꿀처럼 흐를 때


모든 불명료한 것들을 분명하게 발음하려는

이국인의 입술을 이해해


밤이 왔다



/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중에서





힘들 때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면 A와 C사이에 B만이 아닌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시는 '부드러운 팝콘 속 부서지지 않은 탄 옥수수 알갱이'나 '설탕물에 빠져 죽은 하루살이 날개와도 같이'

거기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무 이름도 달지 못하고 사라지는 어떤 삶의 장면들을 가리킨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분이야, 싶은 감정들을 그냥 휘발되게 두지 않는다.

보이는 것만 봐도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무심하게 지나칠 장면에 차마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시를 발견하면 안도한다.


이 시도 그렇다.

그런 게 왜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약간의 반항심이 충족됨을 느낀다.

세상이 보라는 것만 보진 않을 거라는 그런 마음이.


힘들 때 글을 쓴다.

요즘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여기다 글을 쓰려고 노력 중이다.

글을 쓰는 건 나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지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아진다.

불명료하던 것들도 쓰다 보면 조금은 명료해진다.

그러니까 나아질 때까지 쓰고, 읽어야겠다.


사진 출처는 unsplash


두 번의 술 약속이 있던 주말.

떠들썩한 시간이 잘도 흘러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홀로 내가 사랑하는 밤 벚꽃을 보았다.

보란 듯 화려하게 피어있는 밤 벚꽃을 보다가

몇 해 전 우연히 마주친 꽃 하나가 생각났다.


백수 시절 또 시험에 떨어지고

혼자 씩씩거리며 산에 올랐던 그런 날이었다.

평소에 운동도 거의  하는 내가 오직 독기만으로 산을 오르다가  꽃과 마주쳤던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피어있던 꽃 하나.

홀로 핀 꽃이 괜히 안쓰러워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수고롭게 어떤 계절들을 지나 피웠을 그 꽃 한 송이를 오래 바라보던 순간.

아마도 아니겠지만 그 순간엔 그 꽃을 바라봐줄 사람이 꼭 나 하나뿐일 것만 같았다.

그날 그 꽃을 사진에 담았다. 지금도 꺼내보곤 한다.

아직도 그 꽃의 이름은 모른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가사 없는 노래에 흐르는 메시지 듣기.

무의미한 듯 보여도 멈추지 않고 쓰기.

A와 C사이 B가 아닌 다른 경우의 수 찾기.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다정하게 부르기.


지금은 그냥, 그런 것들에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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