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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pr 09. 2023

초록이 저물 때까지

걸어가자

초록이 저물 때까지


                           김경인


저무는 꿈속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네


흙속 흰 애벌레처럼 말랑해진 말들을 끌고

무성한 나뭇잎처럼 귀가 돋은 나무들을

사랑해


그런 밤이면 나는 읽어주었네

누운 나무들 뿌리 내음에 취해


흙속에 묻힌 돌의 매끄러움에 대해

차츰 사라지는 세계의 빛, 차오르는 어둠 속에서

더욱 초라해지며 흩어지는 별자리들을

텅 빈 심장을 울리는 바람소리와

심장 속에서 탁탁 피어오르다

젖어가는 불꽃들을


그럴 때면 나무들은 꿈속으로

걸어들어와 무수한 표정들을

새겨두고 다시 걸어나가고


나는 꿈속에 혼자 남아

외롭지도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꿈속에 혼자 남아


날개를 펼친 새들

빗방울

천국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져서


누군가의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갔네


저물어가는 꿈속

느리게 자라나는 나무들이

이파리를 서서히 거둘 때까지




봄이 왔나, 왔었나, 벌써 왔다 갔나, 아직 봄인가, 이미 끝났나.

지금은 여름인가 겨울인가 봄인가.

당연히 봄이겠지만 자꾸 갸우뚱하게 되는 이상한 봄날이다.

벚꽃이 너무 빨리 피고 져서 어리둥절한 봄날.

서러운 마음이 울컥 올라오는 날들이지만

애써 그 마음을 누르며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날들이다.


나는 원래 매우 감정적인 인간이지만

정작 정말 힘든 일이 닥치면 일단 감정 스위치가 꺼진다.


우선 상황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가고 감정을 풀어둬도 되겠다 싶을 때

그럴 때

겨우 미뤄둔 긴 잠이 밀려오듯 참아뒀던 감정이 비집고 올라온다.

겨우내 숨었던 새싹이 언 땅을 밀고 올라오듯이.

물론 내가 가둬둔 감정들은 새싹처럼 푸릇하고 예쁘진 않겠지만.

이미 모든 게 지나간 후에야 밀려오는 감정이기에 갈 곳을 잃고 얼마간 헤매다 떠나버린다.

그러고도 해소되지 않는 감정들은 가슴에 오래도록 고인다.

다 날아갔으면. 훨훨.


지금은 그저 해야 할 일들을 해내며

감정은 묻어두는 날들이다.

마음을 움켜쥐고 걸어간다.


초록이 저물 때까지


나를 위로하는 건 초록의 풍경들이다.

그래도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풍경들.

한 계절이 지나면 다른 계절이 오는 게 세상의 진리임을 조용히 속삭이듯이.


뿌옇고 흐릿한 이 봄이 지나가면

아름다운 여름날이 올 거야.


그렇게 말해주듯이.


초록이 저물 때까지

아마 나는 괜찮아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초록의 순간들을 보면서 걸어가고 싶다.  

이 흐릿한 봄날을 지나가고 싶다.


'나는 꿈속에 혼자 남아

외롭지도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꿈속에 혼자 남아'


외롭고 슬프고 아무렇지 않지 않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외롭고 슬프고 아무렇지 않지 않은 듯 보이는 말들.

외로움도 슬픔도 아무렇지 않지 않은 마음도

지금은 묻어두고.


걸어가자.

나를 등지지 않을 여름의 품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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