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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歌 #2. '행복한' 피노키오

<널 위한 거짓말>, 세 번째는 '그래야만 나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

by 이글로
그 길 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새 연인과 함께.



별다른 목적 없이 거리로 나섰던 날. 반가웠다. 우연한 마주침에 대한 반가움이었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그것 말고는 도무지 이 바보 같은 짓을 해명할 길이 없으니까.


이불을 걷어차며 잠에서 깨어났다. 저만치 있는 그녀와...... 다정해보이는 한 남자. 그냥 지나치라고, 부르지 말라고, 안간힘을 써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꿈에서조차 그 날의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갑게 부르는 나를 보면서.



"누구야?"



놀람 약간. 경계심 약간. 그리고, 불쾌함.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불쾌함이 조금씩 짙어진다. 자신의 옆에 선 여자와 낯선 남자. 그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단절된 대화 속 멈춰버린 듯한 시간......


조금 늦었지만, 그녀의 입술이 달싹인다. '그냥 친구'라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라고 황급히 덧붙인다. 남자의 불쾌함은 조금 누그러진 듯하지만, 여전히 뚜렷하게 남는다. 본능이었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직감이라는 게 있는 것처럼 남자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그것.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을 때 그 남자는 이미 확신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 얼마나 깊었는지.



조금만 빨리 대답하지. 요즘 그냥 편하게 지내는 남녀 사이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둘러댔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미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를 속이지 못해 지금 내가 이토록 힘들다'고, 나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흔한 안부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만들어진 시간은, 나와 그녀,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연인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두를 '기쁘지 않은 시간'으로 몰아넣었다.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대가로 온몸을 타고 오르는 어색함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잘 어울리시네요."



농담 한 마디라도 덧붙였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나와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건 '잘 어울린다'는 어색한 한 마디 뿐. 너무나 뻔해서 어색함만 더욱 짙게 흩뿌리는 한 마디. 어느새 남자는 그녀의 팔짱을 풀어버렸다. 약간 구겨진 미간과 날카로워진 눈매, 싸늘해보이는 미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서툴게 내뱉은 말까지...... 내 거짓말은 이미 바닥까지 탄로났을 것이다.



머리맡에 놓아둔 자리끼를 끌어당겨 들이킨다. '내가 미쳤지...' 가슴을 치며 탄식을 해본다. 역시 달라지는 건 없다. 째깍, 째깍, 째깍...... 새벽 시간을 흐르는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울린다. 유난히 크게, 그리고 느리게, 난처함에 몸둘 바를 모르던 그녀의 침묵처럼 무겁게 울린다. 저려오는 가슴을 움켜잡는다. 휴우우...... 후회와 자책이 빚어낸 깊은 한숨소리가 울린다. 방 안에, 내 마음 속에.


"오랜만이라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네요. 얘도 너무 뜻밖이라 당황했나봐요. 말까지 더듬고......"



보내야 한다. 보내야 한다. 굳어버린 시간 속에 머리가 빠르게 움직인다. 이미 침범해온 어색함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시간을 더 길게 가져가는 어리석음(愚)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짧게 생각을 하고 말을 잇는다. 자연스러움 따위, 여기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 참...... 제가 괜히 두 분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아뇨, 별 말씀을. 좀 놀랐을 뿐인데요, 뭘.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상투적인 대답.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약간 차분해졌다. 슬며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다시 팔짱을 낀다. 됐다. 빨리 마무리 짓고 이 자리를 떠야한다. 탄력을 받은 머리가 다시 한 번 세차게 돌아간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두 분. 나중에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그럼 일이 있어서 이만......"



꾸벅.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남자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 이 또한 거짓말이라는 걸, 그 남자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풋- 오늘 뻔한 거짓말만 두 번이나 했구나. 돌아선 내 표정이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다.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며 실소를 터뜨린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간을 벗어나자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본심. 좋은 소식? 글쎄...... 그 남자가 그녀를 떠났다는, 그래서 그녀의 옆자리가 다시 비게 됐다는 소식이야말로 나한테는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닐까.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던 생각. 이 새벽 내 잠을 깨운 진짜 이유는 오늘 낮의 실수가 아닌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풀썩- 자리에 눕는다. 여전히 가슴이 저릿하게 아프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지. 그 남자가 떠나버리면 그녀는 또 슬퍼할 텐데. 그녀가 슬퍼할 일을 바란다는 건 나쁜 짓인데......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 어느 쪽이 진짜 내 마음일까. 어느새 심장의 통증이 멎었다. 분명 둘 중 하나는 정답이라는 의미일 게다. 어느 쪽이 정답이건, 한때 나의 사랑이었던 그녀는 내가 없어도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


사랑. 한때 나와 그녀 사이에 존재했던, 쉽지 않은 단어. 이제는 그녀를 잊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다시 그녀와의 사랑을 꿈꾸며 잠을 청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7HUTf57aiZs

2004년 12월 27일자 '김장훈의 거대한 콘서트'에서 부른 버전. (출처 : 유튜브 채널 - Event Horizon (사건의지평선))
참 미안하다
우연히 너를 봤을 때
모른 척 해야 했는데
난 부르고 만 거야

네 옆의 그 사람
조금은 놀란 눈으로
누구냐고 물을 때
넌 왜 말을 못 했니

그냥 친구라고 나를 소개해도 좋아
사랑했던 건 나만의 비밀로 할께

두 사람 잘 어울려요
나를 속이며 애써 웃어도 봤지만
서툰 거짓말이 너무나 슬퍼서
널 볼 수 없었어


어색한 미소로 짧은 인살 건네고
행복하라는 한 마디 미처 못 했어

잘 가요 반가웠어요
이 다음에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두 번째 거짓말 널 위해 남기고
나 돌아서지만

그렇게 조금씩 널 잊어가는게
또 사랑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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