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진심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그래요>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왜 그랬어?"
"......"
마주 앉은 그녀는 평온해보인다. 하긴,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내 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랜만에 먼저 연락이 왔기에 대강 짐작은 했는데...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다짐 같은 거라도 하고 왔나보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어어? 이 놈 보게. 대답은 안 하고 실실 쪼개고 앉아있네?"
"아, 미안. 그냥 우스운 일이 좀 생각나서."
"어쭈,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그때 왜 그랬냐고."
역시, 안 넘어간다. 단단히 작정하고 온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굳이 그걸 알려고 하는 걸까. 나조차도 가물가물해져가던 기억인데. 그녀가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냥 잊고 싶었을 '찌질한' 짓이었는데.
"뭘 이제 와서 알려고 그러냐? 알면 뭐가 달라지나?"
"이 나쁜 놈 말하는 꼬라지 봐라. 내가 그 다음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면서."
"당연히 모르지. 그리고 나 나쁜 놈 맞거든. 몇 번을 물어봐도 대답은 똑~같을테니까 시간낭비 그만 하시고! 거기 그, 손가락에 반지 끼워주신 분이나 만나러 가시죠."
적당한 능글거림. 반지를 언급하자 시선이 그쪽을 향한다. 그 틈을 타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씨, 너 진짜. 그 와중에 반지는 또 언제 봤대. 어? 야 임마, 너 거기 안 서?"
예전의 밝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한때 내 심장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 미소도 여전하다. 나이를 좀 먹은 탓인지 예전만큼 대미지는 크지 않다. 다행히. 끝까지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버려질 것 같아서, 그 비참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이별을 말했노라고. 그 찌질한 이야기를 이제 와서 어떻게 하나. 쪽팔리게 말야.
시간이 흐른만큼 나도 꽤 변했다. 우리가 지금 나이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 모르겠다. 오랜만에 봤는데 커피나 계산해주고 가야지.
우우우웅- 우우우웅-
잠시 울리던 휴대폰 진동이 멈춘다. 불 꺼진 방에 아주 잠시, 적막이 흐른다. 우우우웅- 다시 거칠게 울어대는 휴대폰. 화면 위에 떠오른 발신 번호, 그리고 사진.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뚝. 다시 진동이 멈춘다. '부재중 전화 10통'이라는 문구가 화면 위 그녀의 사진을 밀어낸다.
꼬박 이틀이 지났다.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아 어제는 연차를 썼고, 오늘은 무단결근이다.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뭐,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무책임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겐 이 문제가 우선이다.
이틀 전, 마지막으로 만났다. 어디를 갔었는지, 뭘 하고 다녔었는지, 그런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 혼란으로 가득했던 마지막 표정과 눈가에 살짝 비친 듯 보였던 눈물만 생생하게 떠오를 뿐.
우우우웅- 우우우웅-
11번째 전화가 울린다. 아까보다는 좀 더 오랫동안 울리는 느낌.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걸까. 그렇다면 나도 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수화기 너머 그녀는 말이 없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방. 아마, 그녀도 같은 모습일 거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방문을 잠그고 불을 끄고 혼자 틀어박히곤 했으니까. 휴대폰 불빛만이 어둠 속에 어슴푸레하게 퍼진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정적 속에 나직하게 울린다. '끝'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만이 그 곳에 있다.
"......왜 말을 안 해? 할 말 있어서 전화한 거 아니야?"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뚝뚝한 목소리. 후욱- 좀 더 커진 숨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감정이 북받친다거나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참으려는 걸까. 여태껏 들어왔던 것과 전혀 딴판인 목소리에 한 번 더 놀란 걸까. 고작 몇 초의 침묵. 그저 숨소리 하나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 ...모르겠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생각이 안 나. 머릿 속이 하얘.
느릿느릿, 몇 마디를 힘겹게 끄집어내 넘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였으니까. 그 흔한 신호 같은 것도, 겉으로 드러난 감정 같은 것도 없이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단어, 이별. 결국 내 몫이었다. 마지막까지 잔인한 역할. 그녀는 몰랐고 나 혼자만 알고 있었으니까, 분명 내가 짊어져야할 책임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왜냐고 묻지는 마. 충분히 생각한 거야. 고민도 많이 했고.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바뀔 일 없을 테니까,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그게 정답이야. 다른 여자 생긴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쓸데없는 오해 같은 걸 하고 있다면 버려. 너만 힘들테니까. 그냥 이쯤에서 깨끗하게 끝내자."
또박또박, 하지만 느리지 않게. 모든 말을 쏟아낸다. 대답이 없다. 아니, 아예 반응이 없다. 침묵 곁의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그제서야 휴대폰을 바라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다. 어디까지 듣다가 그런 걸까. 실수로 끊어졌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자리에 누워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 따로 분류해둔 폴더에 그녀의 사진이 한가득이다. 나는 사진 찍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자기를 실컷 찍어달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아마 지금쯤 그녀는 아무 것도 없을 거다. 바라보며 욕이라도 실컷 할 내 사진조차도.
화사하게 웃는 표정. 나를 반하게, 아니 홀리게 만들어 고백까지 이끌어냈던 표정이다. 여전히 가슴 한 쪽이 아릿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오늘 밤은 평소보다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떠나보내는 밤이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GITkh5liTDg
아니요 많이 고민했어요
아니요 이젠 사랑 안 해요
아니요 내가 반했던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을 잡아도 대답은 같죠
아니요 나도 가슴 아파요
아니요 그래도 가주세요
아니요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지만
그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사랑이 그래요 이별이 그래요
부르지 않아도 어느새 끝이 와 있죠
마음이 그래요 조금만 힘들어지면
단 한순간에 변하는 걸요
아니요 잊고 싶진 않아요
아니요 많이 그리울테죠
아니요 헛된 기대 속에 살아보아도
돌아가주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 그렇게 이별이 그렇게
아프게 하는데 왜 자꾸 나를 안아요
그렇게 약해서 그토록 겁이 많아서
어떻게 나를 미워하나요
사랑을 안다고 이별을 안다고
웃으며 말하는 세월이 지난 그 날엔
차갑던 내 맘을 조금은 이해할까요
버려지기 전에 그댈 보낸
부족한 나를... 그댄 나보다... 더 좋은 사람과...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