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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歌 #4. 잊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었던 그 <발걸음>, 내가 어리석었더라

by 이글로

"......뭐야, 왜 왔어?"

"......"


대꾸할 수가 없다. 하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지. 헤어진 게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인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이제 와서 다시 찾아왔다고?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짓이다.


내 마지막 기억. 난 분명 지하철역 출구에 서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처 신경쓰지 못한 채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어느새 내 몸에 새겨져버린 걸음은 잊은 줄만 알았던 이 곳, 그녀의 집 앞에 날 데려다놓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가 집 앞에 도착한, 바로 그 타이밍에.


"깔끔하게 헤어진 건 줄 알았더니...... 이제 와서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돌아가."

"......"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야. 너를 데려다주던 그때 습관처럼, 몸 가는 대로 왔을 뿐이야. 참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데 나, 우리집보다 너네집 오는 이 길이 더 익숙한가보다...... 그렇게 쿨한 척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고 있다.


슬그머니,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깡그리 구겨지더라도, 잠시나마 그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던 걸까. 아니, 아니다. 난 그저 흘러가는대로 왔을 뿐이다. 노을에 걸쳐져 있던 짙은 구름이 하늘을 거닐듯, 그렇게 걸었을 뿐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왜, 이제 와서 후회라도 되니? 아니면, 욕이라도 하러 왔어?"


욕이라...... 이별을 고하는 그녀를, 난 미워했던 걸까?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튼 이 감정이 증오였다고? 글쎄,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 그냥 다 벗어던지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횡설수설 이런 말 늘어놓아봤자 결국은 허울 좋은 변명처럼 들릴 테지.


입술을 악물고 돌아선다. 그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뒤통수가 따갑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뒷모습을 향하고 있음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노을 지는 그 짧은 시간이 지금 내겐 억겁과도 같이 길게만 느껴진다.


이별 후 처음으로 마주한 그녀. 여전히 설레게 만드는 모습이었던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딱 그것 뿐. 이젠 그녀가 정말 내 사람이었는지조차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왜, 이 발걸음은 자꾸 날 이 곳으로 데려왔던 걸까.


철컹-


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등으로 날아들던 따가움이 잦아든다. 휴우...... 가슴 언저리에 꼿꼿하게 박혀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아마 한동안 두고두고 오늘을 곱씹을 테지. 그녀는 어떨까? 구질구질하다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 저만치 씻겨내려가던 감정이 다시 울컥, 북받쳐 오른다.


"널 보고 싶었던 게 아냐. 믿건 안 믿건 그건 네 자유지만, 돌아선 그때부터 난 다 지웠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녀 앞에선 하지 못했던, 쏘아붙여주고 싶었던 말들. 되는 대로 술술 흘러나온다.


"내가 미쳤냐? 그렇게 모질게 차여놓고 미련을 가지게? 너, 똑똑히 기억해둬.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야.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 어떤지. 오늘 너, 고개 숙인 나를 보고 화 냈었지? 두고 봐. 언젠가 네가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보란듯이 웃어줄 테니까. 반드시."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면서 스멀스멀, 미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 나조차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욕하고, 저주하고,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인 것처럼, 악담에 악담을 거듭하며 걸었다.


저만치, 불 꺼진 내 방 창문이 보인다. 문득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짙은 푸른빛 밤 하늘과 달이 보인다.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달. 조금 전 담아두었던 그녀의 모습이 달 속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갑자기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부풀어오르며 일렁이던 하늘이 어느 순간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미안해. 다 거짓말이야. 그냥...... 행복해줘, 언제까지나."



https://www.youtube.com/watch?v=xRfDmiz0iuQ


해질 무렵 날 끌고간 발걸음
눈 떠보니 잊은 줄 알았던 곳에
아직도 너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는지
이젠 자유롭고 싶어

시간은 해결해 주리라 난 믿었지
그것조차 어리석었을까
이젠 흘러가는 대로 날 맡길래
너완 상관없잖니

처음부터 너란 존재는 내겐 없었어
니가 내게 했듯이
기억해 내가 아파했던 만큼 언젠가 너도
나 아닌 누구에게 이런 아픔 겪을테니

미안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잖니
정말 이럴 수밖에
전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너를 사랑할 수 없고
너를 미워해야 하는 날 위해


처음부터 너란 존재는 내게 없었어
니가 내게 했듯이
기억해 내가 아파했던 만큼 언젠가 너도
나 아닌 누구에게 이런 아픔 겪을테니

미안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잖니
정말 이럴 수밖에
전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너를 사랑할 수 없고
너를 미워해야 하는 날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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