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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Oct 27. 2024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43.

도발이 잘 먹히는 녀석은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한 법이다.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 같아서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잡종’이라는 단어 하나가 발작 버튼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교활한 놈이라 앞으로 몇 번을 더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되는 데까지는 활용해야겠다.


[너 이 빌어먹을 새끼… 그 입부터 조각내서 으깨주마.]


잔뜩 화가 난 사내가 공격해 들어온다. 주먹이 날아드는 속도가 매서웠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여유 있게 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 까딱 잘못 피하거나 기운이 분산되기라도 하면 뒤에 있는 휘영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집중력을 높여야 했다. 지금처럼 무력화된 상태의 휘영이라면 눈먼 공격이라도 치명적일 것이다.


‘젠장… 결국 제대로 막아야 한다는 건데… 일단 막으면서 여기서 멀어지도록 유인하는 수밖에 없나.’


빠른 속도로 미친듯이 퍼부어지는 주먹질을 꼼꼼하게 막아낸다. 얼굴부터 복부까지 다양한 타점을 노리고 들어오지만, 발이나 무릎, 팔꿈치 등은 일절 쓰지 않고 주먹만 내지르고 있어 패턴 자체는 단순하다. 자세를 보면 어디로 주먹을 뻗을지 대강 예상이 되니 막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한 방 한 방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그걸 흘려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다. 반작용 때문에 조금씩이나마 충격이 누적되고 있었다.


‘당장 버티는 건 문제가 안 될 거 같긴 한데… 숨겨진 수가 분명 있을 거란 말이지. 의심되는 능력도 여러 가지였고… 공간을 비틀어 아공간을 만들어낼 정도면 최소한 이 주변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건데. 이 자식 밑천을 어떻게 털어낸다…?’


막아내다 보니 공격 패턴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생각할 여유가 조금 생겼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예측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보다도 일단은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을 듯하다. 지홍은 사내의 주먹질을 막아내면서 방향을 바꿔 슬금슬금 움직였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중간중간 빈틈이 보일 때마다 날카로운 반격도 한 번씩 날려주면서 박투를 이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홍이 파상공세에 밀려 조금씩 물러나는 형국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둘은 휘영과 영태가 있는 위치에서 어느 정도 멀어질 수 있었다. 한참동안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던 사내는 그리 오래지 않아 이성이 돌아오며 낌새를 알아차렸다. 


[헉… 헉… 젠장… 한 방 먹었군.]


한참 주먹을 날리던 사내가 공격을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어느새 처음 있었던 자리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지홍을 노려보았다. 잔뜩 화가 나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붓다 보니, 어느새 자리가 바뀌어 있다.

그의 목표인 휘영에게서는 이제 제법 거리가 떨어져 버렸다. 휘영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덜덜 떨고 있을 뿐이지만, 길이 막혀 버렸다. 그녀에게로 접근하는 최단 경로에는 지홍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구도로 접근해도 동선이 보일 수밖에 없는 구도. 이건… 좋지 않다.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어차피 공간 회수만 끝나면…’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힘이 돌아오는 속도를 가늠해본다. 굳어있는 표정의 사내와 달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홍은 조금 여유로워진 모습이다.


“휘유~ 체력이 제법인데? 간만에 온몸이 저릴 정도였어. 그런데, 보여줄 건 이게 다인가? 실력이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주먹질 말고 더 보여줄 게 없다면 실망인데?”

[크으…]


지홍은 여유를 부리며 다시 한 번 도발을 걸었다. ‘잡종’이라는 단어가 발작 스위치와 같다는 건 파악했지만, 저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너무 연달아 쓰면 끗발이 떨어질 것이다. 아껴뒀다가 좀 더 적절한 타이밍에 쓰는 게 낫다. 그보다 문제는, 생각보다 놈이 튼튼하다는 것.


‘당장 시간은 벌었지만… 이제 어쩐다? 생각보다 저 자식 신체 능력이 좋은 편이라 그냥 때려잡으려면 고생 깨나 할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형님이 복귀해서 보고를 올렸을 테니 머지 않아 근원계 쪽에서도 대응이 있을 터. 그 전에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마냥 넉넉하진 않은데… 뭔가 뾰족한 수가 없으려나.’


블러핑을 위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실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근원계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니 시간도 촉박하다. 게다가 애당초 지홍은 전투에 특화된 타입이 아니다. 맨몸으로 싸우는 거라면 그럭저럭 해낼 수 있지만, 영 능력까지 동원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대개 숙련도가 높으니 어떻게든 공격에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판세를 뒤집을 만큼 명확한 한 수가 마땅치 않다.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공격하는 입장이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나지 않으니, 이대로는 육탄전을 벌여봐야 지지부진한 체력 소모전일 뿐. 게다가 지금까지의 단서들을 생각해보면 저쪽은 이것저것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인다. 직접 확인한 것이 없다는 게 문제. 왜 쓰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상황이다.


[후우… 아니지… 그래. 당장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너도 딱히 이렇다 할 묘수는 없는 모양이군.]

“…….”


지홍은 여전히 겉으로 여유로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원래 머리가 교활하게 돌아가는 놈이었으니 이런 상황이라면 눈치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수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쓰는 영역은 그에게 자존심의 문제니까. 조금이라도 더 교란시켜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지홍 쪽에서 먼저 공세에 나섰다.

사내는 번개처럼 뛰어들어오는 지홍을 향해 오른 주먹을 뻗었다. 무방비 상태로 달려드는 듯하던 지홍의 신형이 주먹에 닿기 전 흐릿해지더니, 잔상만 남기며 사라졌다가 사내의 오른쪽 뒤편에서 나타났다. 주먹을 크게 내지른 쪽이라 일시적으로 사각이 만들어진 방향.


[젠장, 영 능력인가?]


쾅-!!

큼직한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어느새 원래 자리로 돌아간 지홍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깝네. 제대로 한 방 꽂아줄 수 있었는데. 그 순간에 막아낼 줄이야. 방어계 능력도 있었나?”

[네놈이야말로 순간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꽤 귀찮은 타입이었군.]

“글쎄… 뭘까. 생각을 많이 해보라고.”


지홍은 가장 단순하게 쓸 수 있는 패를 던졌다. 어차피 먹힐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 공격이 실패한 데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녀석은 이제 사각에서 생각보다 빠른 공격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좀 더 신중해질 것이다. 쐐기를 박기 위해 두어 번 정도 더 사각을 노린 순간이동 공격을 감행했다. 당연히 막을 거라 예상했으니, 힘은 적당히 조절해서. 

제자리로 돌아온 지홍은 무릎 꿇은 자세로 의식을 잃은 오진우 형사 쪽, 그리고 기대어 앉은 채 기절한 정영태 팀장 쪽을 번갈아가며 흘끗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 알 수 없는 폭발 능력은… 조금 전에 저쪽 젊은 형사를 대상으로 쓴 것 같군. 그런데 어떻게 한쪽 팔만 저렇게 될 수 있는 거지? 게다가 기폭 지점에 있었던 당사자치고는 부상이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다. 폭발력을 정해진 방향으로 집중시킬 수도 있다는 건데 

뭐, 그거야 일단 그럴 수도 있다 치고… 그럼 폭발 능력은 왜 쓰지 않는 거지? 지금까지도 얼마든지 공격에 쓸 수 있을 텐데? 발동 자체에 어떤 제한 조건이 있어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뭔가 노림수가 있어서 아껴두고 있거나…’


문득 지홍은 조금 전 공방을 주고받았던 모습을 복기해보았다. 상대는 마구잡이로 난타전을 벌이는 듯했지만, 휘영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안에서만 움직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진우는 전혀 안중에 없는 듯한 움직임이다. 한쪽 팔을 폭발시킨다는 극단적 수를 쓴 것 치고는 너무 무관심한 모습.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봤지만, 모두 이렇다 할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큰 그림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 젊은 형사는 아무런 변수도 되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해서 방심하도록 하고, 결정적인 한 수로 쓰려고…? 젠장, 머리 아파 돌아가시겠네.’

[머리 굴리는 게 너무 티가 나는 거 아닌가? 먼저 오지 않겠다면 다시 내 차례다. 흠… 이번엔 좀 다를지도 몰라.]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가 최단 거리로 돌진해 들어온다. 또 같은 패턴이다. 다시 주먹을 빠르게 놀리며 수십 차례 방어를 유도하더니 뒤로 점프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전처럼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닌데 이런 단순한 공격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움직임에 지홍은 오히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이 자식, 뭔가 노리는 게 있다.


“쓸데없는 짓을…! 무슨 꿍꿍이지?”


대답은 없다. 그 순간 지홍은 상대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미묘하게 여유를 되찾은 것 같달까. 마스크로 가려진 하관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웃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공격을 막아낸 뒤의 느낌이 이질적이다.


‘힘이… 달라졌다? 왜…?’

[이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짚었던 것 같군.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 녀석과 비슷한 느낌이길래 긴장했었는데 말이야. 방금 한 번 더 부딪혀 보니 확실히 알겠어.]

“뭐라고…?”

[아아, 넌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아무튼… 그 녀석이 아니라면 굳이 몸 사릴 이유가 없겠군. 마침 저쪽 공간의 갈무리도 끝나가는 마당이니 이제 좀 제대로 놀아줄 수 있게 됐어.]

“자꾸 무슨 소릴… 큭!”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사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더니 공격을 가해왔다. 지홍은 깜짝 놀라 급하게 방어를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는다.


‘분명해. 힘 뿐만 아니라 속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힘을 숨기고 있던 느낌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느닷없는 공격이라 방어 타이밍이 다소 늦었다는 걸 감안해도, 확연히 위력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홍의 예민한 감각은 한 방 한 방에 실린 힘이 최소 두세 배 가까이 늘었다는 걸 알려왔다. 입장이 바뀌었다. 지홍은 이제 여유로움을 연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조금 전 사내가 했던 말을 차분히 되새겨보았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딱히 희망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갇혀 있었던 흑막 공간 때문일 것 같군. 그 양반 말에 의하면 공간을 유지한 만큼 힘이 약해진다고 했으니… 그럼 ‘공간 갈무리가 끝나간다’라는 건 그쪽에 분산시켰던 힘을 거의 다 회수했다는 의미일 테고. 어쩐지 생각보다 약해 보인다 했더니… 이런 식의 반전은 곤란한데. 어쩐다…? 그냥 난타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으려나.’

[이봐. 아까 보여준 잔재주 말고, 또 숨겨놓은 건 없나? 있으면 지금 꺼내놓는 게 좋을 거다. 이젠 기회가 별로 없을 거거든.]


상대의 도발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공격에 실린 힘의 변화를 생각하면 막아내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 또, 현재 휘영의 상태도 문제다. 이제는 눈으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저 놈이 내뿜는 섬찟한 기운에 제압된 셈인데, 힘이 더 강해졌다면 지금보다 나아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내뿜는 기운은 더욱 진하고 뚜렷해질 테니까. 오히려 벌벌 떠는 와중에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기특할 정도다. 

물론 휘영의 정신이 말짱하다고 해도 심각한 부상자가 둘. 그들까지 데리고 도망가는 건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지홍은 자신도 모르게 씨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절망적인 상황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어딘가에서 해결책이 생길 것만 같다는 막연한 느낌. 물론 근거는 없다. 만화 같은 곳에 나오는 ‘도저히 질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이랄까. 

기운을 슬쩍 흘려 주위에 퍼뜨려 두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알고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놈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개잡종 새끼가 알량한 힘 좀 되찾았다고 아주 기가 살았구만? 그래, 우쭈쭈~ 개새끼야. 어디 한 번 들어와보시지.”

[하…? 뭐지? 답이 안 나오니 돌아버린 건가? …박살나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더 열받게 할 수 있는 멘트를 고르고 싶었지만, 이젠 여유가 없다. 어차피 기회도 더 없을 것 같고. 급하게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쌍욕을 섞어서 던져버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약발’이 안 먹힌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그냥 분노 스위치만 최대치로 가동시킨 꼴이 돼 버렸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공격이 들어온다. 지홍은 온힘을 끌어모아 방어 태세를 취했다.


콰앙-! 쾅!

쉼없이 쏟아붓던 난타와는 달라진 패턴. 약간 위에서 내리꽂는 각도로 떨어지는 한 방. 연이어서 직선으로 빠르게 질러오는 한 방. 단 두 방의 단순한 주먹질이었지만 충격량은 마치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포탄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다. 그새 파워가 더 늘었다. 그 ‘공간 갈무리'라는 게 더 진행됐나보다. 아니면 완전히 끝났거나.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다음 공격을 막기 위해 집중력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순간 정면에 있던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놓쳤다고? 내가? 어디로… 헛!”


당연히 휘영 쪽으로 향했으려니, 하다가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몰려드는 기운을 느끼고 방향을 바꿨다.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사내는 어느새 다시 정면으로 이동해 있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아까 말했지? 공간 갈무리가 거의 끝났다고. 그리고 조금 전에 완전히 끝났거든. 이제 더욱 재미있어질 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네놈을 뭉개놓은 다음에 느긋하게 진행하면 되겠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시 공격이 시작된다. 오른쪽, 다시 앞쪽, 위쪽, 뒤편 사선, 아래쪽, 왼편 사선, 뒤쪽… 사방팔방에서 불규칙하게 주먹이 날아온다. 예민한 감각 덕에 공격 방향을 따라잡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치명타를 방어한 것일 뿐, 한층 더 무시무시해진 충격이 내부를 뒤집어놓고 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젠 기댈 곳이… 없다. 조금 전 불현듯 찾아왔던 근거 없는 예감 말고는.






사내는 상처투성이가 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지홍을 내려다보았다.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한손을 뻗어 지홍의 목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지홍은 압박된 숨길 사이로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두 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잡아 뿌리치려 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힘이 많이 빠진 탓도 있겠지만, 애당초 격차가 너무 벌어진 상황이었다.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크윽……”

[이상한 표정이군. 아까부터 잔머리를 엄청 굴리는 것 같던데… 중간쯤부터는 너도 예상할 수 있지 않았나?]

“…….”

[궁금한 게 많을 거야.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무렴 네놈들이 나같은 존재를 어디서 만나봤겠어. 내 스스로도 가끔 놀라울 정도인데 말야. 네놈이 생각보다 약해빠진 덕분에 여유가 좀 남았거든. 마지막에 보여준 패기가 꽤 신선하기도 했고. 보답으로 궁금증 정도는 풀어주도록 하지. 어차피 영혼이 박살나면 건질 수 있는 기억도 별로 없겠지만.]

“…….”

[아, 이 꼴로는 숨만 겨우 쉬는 정도이려나? 좋아. 그럼 그냥 내가 말해주지. 난 말이야, ‘영’을 내 마음대로 조각내서 다룰 수 있어. 그런 능력이 어떻게 가능하냐고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그냥 태어나보니 이렇게 돼 있었는걸.]


지홍의 목을 움켜쥔 사내의 손아귀 힘이 조금 풀린다. 하지만 여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숨을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는 정도.


[나눠진 영 조각으로는 많은 걸 할 수 있지. 이를테면 누군가의 머릿속에 내 의지를 심어 두고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고, 좀 더 큰 조각을 넣어두면 필요할 때 그 녀석을 조종할 수도 있어. 물론 감시하는 눈도 많고 숨어지내야 하는 입장이라… 기척을 숨겨 존재감을 없애는 것도 가능하지.]

‘젠장… 그런 거였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괴물 새끼였어.’

[어느 정도까지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폭발도 내 작품이야. 전체는 아니더라도 몸 일부에 내 영 조각이 스며들어있으면 그 부위에 한해 내 의지대로 조작할 수 있거든. 물론 위력은 영 조각을 얼마나 썼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외의 것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참… 재미있는 능력이지 않아? 어떤 괴물 같은 놈에게서 베껴온 걸까? 아니면 이것저것 섞어놓은 걸까? 의도한 걸까? 우연히 만들어진 걸까? 그건 좀 궁금하긴 하더라고.]


사내는 쿡쿡 소리를 내며 한동안 웃었다. 


[너와 싸웠던 이 몸뚱이가 내 본체일까? 그건 알아서 판단해보도록 해. 꽤 공을 들였고 오랫동안 쓴 몸이라는 건 힌트로 알려주지.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아, 혹시 또 몰라. 난 거짓말을 꽤 잘 하니까, 이 모든 게 거짓말일지도? 킥킥킥.]

‘이 미친 새끼가… 아주 여유가 넘치는구만.’

[……자,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볼까?]

‘문제…?’

[지금 네 모가지를 붙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내 능력을 쓰면 어떻게 될까? 네 뒤에 있는 아가씨는 나한테 좀 중요하니까 빼고… 너랑 나머지 두 놈한테만 화력을 나눠서 집중시키면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때?]


빌어먹을. 지홍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영의 조각이 심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제한조건이라면, 자신과 싸우는 동안 별다른 능력을 쓰지 않았던 것도 설명이 된다. ‘쓸 수 없었던’ 것이다. 폭발 능력이야 쓸 수 있었겠지만 제 팔이 날아갈테니 못 썼을 테고.

이 몸뚱이가 본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전투는 끝났다. 이 놈은 힘이 넉넉히 남은 것 같으니, 여기서 팔 하나쯤 날리고 다른 놈을 찾아 옮겨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그야말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에 묶여있는 셈이라는 거지… 씨발… 꼬여도 이렇게 더럽게 꼬일 수가 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 공간을 빠져나왔을 때, 본능적으로 감지 능력을 작동시켜 보았다. 단숨에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전투 도중,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때 다시 한 번 감지 능력을 썼다면 좀 더 빨리 판단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래봤자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 결국 운명이었나. 젠장.’ 


돌이켜봐도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아니, 애당초 선택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 야산에 들어온 후, 모든 것이 마치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흘러갔으니까. 클클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는 예감은 그냥 흔하디 흔한 ‘근자감’이었나보다. 움직일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뭐가 해결될 수 있을까. 근원계의 명을 받은 백현이 자신을 압송이라도 하러 온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대답이 없네? 뭐, 상관 없겠지. 짧았지만 재미있었다. 돌아가거든 나중에 꼭, 잊지 말고 날 찾아와달라고.]

그 말과 함께 지홍은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며 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손목 즈음부터 팔, 어깨까지가 하얀 빛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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