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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Oct 12. 2020

내 이름은 은쎄오

이상하고 고마운 다비드에게

어쩌다 보니 두 번째 리옹 이야기.



리옹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나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한 가톨릭 대학 부속 어학원에 다녔다. 한국인 유학생의 비율이 높은 학교였는데, 내가 속한 클래스는 한국인이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여섯 명의 중국인이 있었고, 그 밖에는 독일, 일본, 멕시코, 베네수엘라, 몽골, 알제리 등 다양했다.


그리고 그 애. 나를 볼 때마다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아이는 콜롬비아 출신의 다비드(David)란 이름을 가진 남학생이었다.


다비드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지나칠 만큼 활발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기 힘들었다. 분명 프랑스어로 말하는데 발음이나 억양이 제멋대로였다. 내가 짧은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씩 되묻자 답답해하면서 다른 친구에게 질문했던 것도 아마 첫 시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각자 모국어의 발음과 억양을 버리지 못해 생긴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땐 소위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재수 없었다.’ 흥.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그 애는 항상 내 왼쪽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 나는 비교적 대화가 수월한 일본인 친구와 나 사이에 떡하니 앉는 그 애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어찌 붙어서 수업하다 보니 우리는 서로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수업은 문제를 풀고 답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맨 처음 혼자 문제를 풀고 나면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는 짝이랑 비교해보세요.” 내가 듣지 못한 건 다비드가 들었고, 나는 그 애가 들리는 대로 마구 받아 적은 문장의 스펠링과 문법을 고쳐 주었다. 어느새 나는 습관처럼 왼쪽을 봤다.

 

다비드는 스킨십이 잦았다.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은 수업 도중에 뜬금없이 손으로 내 발을 잡는 거다. 더러운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내 발을.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으나 어물쩍 넘어갈 뿐, 어떤 설명도 없었다. 이상했다. 콜롬비아 출신 남자와 교제한 적이 있다는 같은 반 한국인 유학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유를 묻자 ‘그냥 그 애가 이상한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이 처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동기들에게서 들은 선생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슬펐다.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게 큰 위로가 되어준 이가 힘이 필요할 때, 아무런 힘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항공사 사이트에 접속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 가격을 살폈다. 무리였다. 3평 남짓한 기숙사 방 안에서 펑펑 울며 되뇌었다. 나는 왜 한국이 아니냐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인데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다음 날 부은 얼굴로 학교에 갔다. 몸은 교실에 있었지만, 자꾸 한국에 계신 선생님이 생각났다. 더 흐를 눈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운 것도 잠시,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얼굴과 마음을 추스르고 반으로 돌아갔다.


다비드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은쎄오. 난 너랑 같이 여기 있어서 기뻐.” 그 말은 모든 위로의 말로 몸을 바꾸어 나를 닦아주었다.

  

은쎄오.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지만 내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은 부르는 자의 것이기도 하니까. 그때 나는 은쎄오(eunseo의 스페인어식 발음)였다. 가끔, 아니 자주 다비드를 생각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 나와 달라 찾게 됐던 사람, ‘거기’ 가지 못해 아픈 내게 ‘여기’ 함께 있어 기쁘다고 말해준 사람. 콜롬비아와 한국의 시차는 14시간이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혹 만나게 된다면 그 애 손에 나의 발 대신 손을 쥐여 주고 싶다.




종종 다비드 꿈을 꾼다. 꿈에서 깨고 나면 학기 마지막 날 그 애와 찍은 사진을 꺼내 본다.

한때는 SNS로나마 그 애를 찾으려 애썼고, 한국에 놀러온 그 애와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고, 껴안고, 하루쯤 함께한다. 되지 않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가며, 종종 무의식중에 모국어를 써 가며. 그러나 언어 같은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실없이 웃는다.

이제 그런 것들은 바라지 않는다고, 그 애가 건강히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고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미련한 나는 여전히 바라나 보다.

잊지 않고 살다 보면 언젠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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