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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r 17. 2024

러시아 격변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

 <소네치카*스페이드 여왕>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2023, 문학동네)


‘러시아 격변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

<소네치카*스페이드 여왕>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2023, 문학동네)


 가수 심수봉이 1997년에 발표한 <백만 송이 장미>는 1981년 작곡된 라트비아(Latvia/소비에트 연방) 가요인 '마라가 준 인생'을 번안한 곡이다. 애절한 음색의 이 가요는 라트비아(Latvia)가 처한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운명과 비극적 역사를 모녀 관계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곡의 가사는 딸 ‘라트비아’가 어머니 마라의 사랑으로 잘 성장했지만, 독일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끔찍한 운명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격변하는 나라에서 부모와 국가의 보호받지 못하는 여인들은 이 노래에 나오는 ‘라트비아’처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소네치카>와 <스페이드의 여왕>(2023, 문학동네)의 두 개의 짧은 단편에서 변화무쌍했던 20세기의 러시아에서 부평초처럼 떠다녔던 여성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1943년생 작가 류드밀라는 러시아 현대 문단의 대표 작가다. 그녀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 직장을 구했지만, 지하 출판물을 읽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 뒤 류드밀라는 각본, 소설, 평론을 쓰며 각종 창작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92년 발표된 첫 중편소설 <소네치카>로 그해 러시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프랑스 메디치 상과 이탈리아 주세페 아체 비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렸다. 소설마다 새로운 여성상을 선보이고 있는 작가는 풍부한 표현력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첫 번째 단편 <소네치카>는 문학소녀였던 주인공 소네치카를 중심으로 그녀의 남편 로베르트 빅토로비치, 딸 타냐, 딸의 친구 야샤의 이야기이다. 책을 사랑했던 소네치카는 전쟁으로 피난 중에도 도서관 지하실에서 일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녀는 우연히 책을 빌리러 온 로베르트와 만나고 청혼을 받는다. 힘겨운 피란 생활 중에도 소네치카는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과 딸 타냐와 함께 나름 만족스러운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타냐가 데려온 친구 야사가 남편 로베르트와 불륜에 빠지면서 소네치카의 평화로운 가정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격변하는 소비에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현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막장’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

 

 두 번째 작품 <스페이드의 여왕>은 60세의 안과의사 안나 표도로브나가 90세의 어머니 노파 무르, 딸 카탸, 손녀, 손자와 한집에 살면서 겪는 이야기다. 일상을 책임지는 안나는 화려한 과거만을 그리는 어머니 무르와 함께 삐걱대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아슬아슬한 가족 관계는 전남편 마레크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녀는 육십 평생 처음으로 어머니의 의견에 반대하며 몰래 아이들을 해외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당일 아침, 무르의 갑작스러운 우유 심부름을 나갔던 안나는 길거리에서 큰일을 당한다.


 두 작품 모두 해외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남성 작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여성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러시아 여성들의 삶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작가 류드밀라는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각각의 사람들의 생각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점은 단점이 될 우려도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가릴 것 없이 마음속 심리들이 자세히 묘사되거나 은유적으로 쓰여 독자들이 주의하여 읽지 않으면 줄거리 파악하기 어렵다.


 작가는 다양한 등장인물 소네치카, 타냐, 야샤, 무르, 안나 등을 통해 러시아 격변기를 보냈고, 각각 조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변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특히 전쟁과 피란이라는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들의 삶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소네치카>의 세 여인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첫 번째 여인 소네치카는 전통적인 모성애와 지극히 순종적인 아내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공방에서 남편과 야사의 불륜을 알아채지만,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사람 옆에 그렇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겼다는 건 정말 공평한 일이야.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걸맞게 말이야.”(p.76)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항상 ‘못생기고’ 부족하다고 여겼던 그녀에게 뛰어난 예술가였던 남편은 과분한 사람이었다. 소네치카는 문학작품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여성이었지만,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고 고상한 것만을 누리는 남편과 딸에게 “자신의 팔자를 투덜거리거나” (p.58) 그들이 누리는 우아한 ‘복지’를 질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17년 동안의 가정생활을 순식간에 뺏기고 외로운 노년을 보냈지만, 묵묵히 본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러시아 여성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번째 인물, 딸 타냐는 역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p.45) 모든 소망들을 쉽게 충족할 수 있었던 그녀는 어머니 소네치카에 비해 욕망을 표현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다. 타냐는 남자들과의 문란한 생활에도 자유로우며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쟁취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갈망하는 존재는 폴란드 소녀인 친구 야사이다. 타냐는 야사와 아버지의 불륜을 보고도 친구의 비행을 원망하기보다는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낀다. 아버지 로베르트의 예술혼을 닮은 그녀이다. 결국 타냐는 남자친구였던 알료사와 결혼해 페테르부르크에 건너가고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만끽한다.


 세 번째 인물 야샤는 좀 복잡한 면모를 지닌 여성이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불안한 성장 배경 탓에 여러 남자에게 혹사당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러시아의 수백만 사람들 가운데 융화되지 못하고” (p.53)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되었고, 고아원에 보내진 야샤는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잘 이용”해야 했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남자들과 계산을 치르는 간단한 방법을 터득”(p.53)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도움을 일절 받지 못했던 야샤가 소네치카의 남편 로베르트를 유혹해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약자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들의 삶은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모두가 쉬쉬하며 숨기는 진실 앞에서 류드밀라는 과감히 목소리를 녹여 러시아 여성의 삶을 대변했다. 러시아 여성들이 살았던 인생의 모습이 보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당장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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