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류드밀라 울리츠카야,2023
당신이 아는 표독한 ‘메데이아’는 류드밀라의 ‘메데야’가 아니다.”
“당신이 아는 표독한 ‘메데이아’는 류드밀라의 ‘메데야’가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파란만장한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 편은 독자들의 공분을 살만한 장면들이 많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 이아손을 돕기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없앴다. 급기야는 배신한 이 연인 때문에 둘 사이에 낳은 두 아들마저 제 손으로 죽여 복수하였다. 그야말로 ‘마녀’라는 명칭이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복수의 대명사인 인물의 이름을 따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문학동네, 2023)이라는 작품을 펴냈다. 혹시 이 작품이 ‘피 맺힌 복수극’이라는 상상 하며 신나는 마음으로 작품을 펼치는 이가 있다면 잠시 손가락을 멈추길. 424쪽의 이 대하소설은 한 여인의 복수극이 아니라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성품을 지닌 메데야를 중심으로 형제자매들의 자손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이다.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의 첫 장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방대한 시노플리 가계도이다. 메데야의 가문은 아주 옛날 그리스에서 크림으로 이주했다. 이 책에서는 메데야의 조부모, 부모, 메데야와 형제자매, 조카들, 종손들과 그들의 아이들 여섯 세대의 이야기가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촘촘히 전개된다. 이 세대들의 삶은 ‘러시아 혁명, 내전, 농촌 집단화와 스탈린 대축청, 강제 이주’ 등 20세기 러시아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 결과 메데야를 제외한 가족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다. 남편이 죽은 후 크림에 홀로 남은 메데야는 해마다 형제자매들의 자손들을 불러 모아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언제나 시노플리 가문의 굳건한 중심처럼 보이는 메데야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쓰라린 치욕’이 하나 있다. 그녀의 남편 사무일과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일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 하나뿐인 아내 메데야에게 무척 충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메데야는 사무일 사망 1주기에 우연히 펼쳐본 여동생의 편지에서 여동생과 남편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한다. 그 일로 그녀는 항상 “자발적으로 한 곳에 머물러 살던 소중한 삶”(p.263)과 떨어져 다른 가족들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메데야는 그녀의 조국 러시아에 몰아 닿치고 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조금씩 인식한다. “스탈린과 작별하는 날 모스크바에서 일어나 대규모의 살인”, 폭군의 죽음 이후 “하룻밤 사이에 변한 세상”(p.264)에서 불안한 사람들, 그런 거대한 현실 앞에서 그녀는 여동생과 남편의 불륜 같은 개인적인 아픔쯤은 ‘마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지 잠시 고민한다. 이미 남편은 죽었고, 자유로운 영혼의 여동생은 그런 죄를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의 평화를 깨고 이미 죽은 남편의 죄를 밝힐 필요가 있을지 망설여졌다. 고민하던 메데야는 오빠 표도르의 아내이자 친구 엘레나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 상처를 덮기로 마음먹는다. 엘레나 역시 입양한 아들 슈리크가 남편의 불륜으로 생긴 아이인 줄 내심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는 잔인한 복수의 대명사였던 ‘마녀 메데이아’를 왜 작가가 이 작품에서 기품 있고 절제력이 강한 여인 ‘메데야’로 각색했을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메데야는 자유로운 성품을 지녔던 여동생 알렉산드라와 손녀 마샤에 비해 인내와 절제가 강하고 사람들의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남편 사무일의 불륜을 알고 난 이후에도 복수심에 날뛰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볼 줄 안다. 쉽게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주변의 일들에 대해 침묵하고 포용했기에 형제자매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녀였기에 비록 아이들을 낳지 않았지만, 어린 자손들은 그녀를 항상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메데야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은 “이건 놀랍도록 즐거운 느낌이다”(p.388)라는 기분을 후손에게 안겨주었다.
작가 류드밀라가 창조한 굳건한 성품의 ‘메데야’는 혼란한 시대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의지가 되고 구심점이 되는 존재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사느냐 죽느냐, 떠나느냐, 마느냐”(p.325)는 고민 속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는 러시아 사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메데이아’의 과격한 복수와 응징보다는 꼭 붙들어 주고 모른 척해주는 ‘메데야’의 포용과 침묵이 더 필요했다.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손녀 마샤와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하고 불안한 성정은 아직 체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과도기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독’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작가 역시 ‘메데이아’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마샤에게 혹독한 운명을 선물하고 ‘메데이아’의 곧은 성품을 닮은 메데야와 엘레나에게는 속은 아프지만, 겉으로 평온한 삶을 선물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 류드밀라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섬세하고 따뜻하다. 특히 ‘소비에트 체제의 집단주의 기조 속에서 가족적 가치를 복원’ 하기 위해 애쓰는 시도들은 독자들이 러시아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은 가독성이 뛰어난 소설이 아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진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류드밀라의 섬세한 묘사와 복잡한 스토리텔링을 즐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직 한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길 원하는 독자들은 숱하게 쏟아지는 방대한 서사와 이름들을 보다가 금방이라도 책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순차적으로 ‘친절하게’ 서술되지 않는다. 메데야의 선조, 후손, 자매, 그 이웃의 과거와 현재까지 자유롭게 이야기를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 책은 묘하게도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상들이 어떤 여성 인물들에게 투영되었는지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속에는 남신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신화시대에서 아프로디테의 자유분방함, 헤라의 절제, 아테네의 현명함이 숨어있다. 과거 남성의 관점으로 희생되었던 ‘메데이아’와 그 주변 인물들이 펼치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