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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y 14. 2024

인간이 가진 도전과 욕망을 나누는 기준

러시아 작가인 톨스토이는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이자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심리와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시절과 종교에 심취했던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탐구하던 시절의 톨스토이는 주로 인간의 삶과 사회의 모순, 심리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때 완성한 작품들이 바로 유명한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이다. 기독교 신앙에 몰두한 이후부터 작가는 종교에서 얻은 성찰과 고민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 시기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와 같은 단편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에는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작가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림책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야나가와 시게루, 미래 아이)는 톨스토이 단편을 쉽게 각색한 책이다. 이 작품은 황톳빛의 부드러운 색조와 연한 색깔의 화풍으로 표현되어 독자들이 글 내용과 그림을 함께 읽고 음미하기가 편안하다. 책 표지를 넘기면 비실거리는 망아지가 모는 낡은 달구지와 한 남자, 굴뚝 속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는 초라한 집들이 있다. 한쪽 구석에는 꾸부정한 등을 가진 한 남자와 강아지가 터벅터벅 걷고 있다. 저 멀리에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십자가가 달린 교회가 서 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 풍경이지만, 전체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인 농부 파흠은 본인에게 필요한 정도만 욕심내며 성실히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느 날 아내의 처형이 찾아와 파흠 부부의 초라한 농촌 생활을 비웃자, 그는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때 악마가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후 이상하게도 파흠에게 넓은 땅을 가질 좋은 기회들이 자주 찾아온다. 그는 근면하게 일하며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큰 부자가 된다. 하지만 소유한 땅 때문에 이웃들과 지속적인 불화가 생기고 파흠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쉬끼르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흠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 다닌 땅을 싼 가격에 팔겠다는 거였다. 단, 저물녘까지 시작한 지점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 계약은 무효였다. 파흠은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하는데….


 교훈과 절제를 중시하는 책들을 많이 읽은 이들이라면 파흠의 이런 행동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쉽게 짐작할 것이다. ‘청교도적인 설교자’를 자처했던 톨스토이는 인간의 욕심이 죽어야 끝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생각 때문인지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꿈꿨던 파흠의 결말은 비참했다. 그저 비옥한 땅을 꿈꿨을 뿐인데, 파흠의 욕망은 악마의 손아귀로 키워진 헛된 것으로 표현된다. 결국 그는 평생 손에 잡히지 않는 땅을 그리며 마냥 달리다 무너졌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모든 욕망은 해로운 것이냐고 말이다. 인간의 삶에서 어느 선까지의 욕망이 허용될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 책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인간의 욕망이 부질없는 악마의 유혹이라고 단정 지었다. 얼핏 생각하면 이런 주장이 ‘본인의 분수에 맞게 살자’, 혹은 ‘욕심을 부리지 말자’라는 바람직한 교훈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미 부를 획득한 기득권자들이 도전하려는 자들에게 던지는 무서운 위협처럼 느껴진다. 더는 본인들의 공간으로 침범하지 말라는 빨간 경고등처럼 말이다. 돈을 차지할 수 있는 땅과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본인들의 영역을 나눠줄 마음이 없는 기득권자들은 열정적으로 도약하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분수를 지키라’는 말을 연신 주입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읽으며 내내 생각했다. 내가 만일 파흠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나 역시도 무조건 열심히 걸어서 가능한 많은 땅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눈앞의 좋은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소확행(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도 일단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돈은 더 많은 행복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단 꿈을 꾸고 도전해야 한다. 톨스토이의 생각에 따르면 그런 도전은 악마의 유혹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다가온 기회 앞에서 잡을 수 있는 알찬 도전과 버려야만 하는 헛된 욕망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오늘따라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고 외치던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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