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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02. 2024

나의 삶은 나이가 들수록 사회와 더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작년 겨울, 병무청에서 보내온 아들의 신체검사 용지를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파랗고 빨간 병무청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봉투 밑에는 이제 큰 애가 국방의 의무를 질 나이가 되었다는 서류가 무겁게 담겨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은 이제 겨우 고3의 끝자락, 울퉁불퉁한 여드름 자국이 있고 ‘수능’이 끝나면 하루 종일 자고 싶다는 계획을 세우는 철부지 꼬맹이였다. 그런 아들을 국민을 지킨다는 군대로 보내려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당시 아이의 모습은 무거운 총을 들고 전우들과 군가를 부르기보다는 컴퓨터 까만 자판을 붙들고 게임 속 캐릭터들과 아웅다웅하는 것이 딱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몇 년 안에 아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군대에 가야 한다. 원래 군인들은 씩씩하고 믿음직한 '사나이'들의 대명사가 아니었던가. 저렇게 끼니때마다 배고프다고 찡찡거리는 꼬맹이가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온전한 내 시간의 속도보다는 그들의 흐름에 따라갈 때가 많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밥을 먹을 때도 내가 배고픈 시간보다는 가족들의 배꼽 시간에 맞췄고,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을 때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아이들의 일이 첫 번째였다. 특히 아들 녀석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부터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의 세월을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췄다. 그야말로 오로지 아들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 일정에 시간과 열정을 다하는 기간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왜 이렇게 ‘어머니의 도움’를 바라는 일들이 많은지…. 아이들이 어릴 때면 아침마다 초록색 깃발을 들고 '녹색 어머니' 활동하고, 매년 신학기면 각 학교의 학부모 총회, 공개 수업과 학교 봉사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식들을 키우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시간이었다. 


 고3이었던 큰 애가 올해 대학을 진학하고 나서야 일방적으로 따라가던 학교와의 연결이 이제야 끊어졌다. 대학교야 뭐 본인이 알아서 할 테니 예전처럼 종종거리며 학교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난 아들의 나이는 20세, 이제는 그 녀석도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 그 말은 곧 아들이 본인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혼자서 결정하고 선택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마음으로 겨우 아들 걱정을 내려놓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데 이번에는 국가의 부름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단 한 번도 가깝게 느끼지 않았던 군대라는 곳! 사실 아들이 병무청의 신체검사 공지를 받기 전에는 군대는 막연히 '대한민국 남자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의 의미였다. 북한과 아직 휴전 중인 남한에 살고 있으니 국방의 의무만큼 필수적인 것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특별히 가깝게 여긴 적은 없었다. 여자인 나에게 군대는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몇십 년 전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왜 남자만 군대에 가야 하냐고" 툴툴거릴 때도, 대학교 시절 군대를 다녀온 동기들이 무게 잡고 '군대 썰'을 풀 때도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나에게 군대는 그저 철부지인 대학 동기들을 갑자기 아저씨로 변화시키는 신기한 장소였을 뿐이다. 그런 곳을 우리 큰애가 몇 년 안에 가야 한다.


 이제야 지금까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아들을 둔 선배 엄마들의 남모를 조바심과 걱정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한 엄마는 육군 현역보다는 카투사로 복무했으면 좋겠다며 아들이 왜 영어점수에 신경을 안 쓰는지 답답해했다. 또 어떤 이는 아들이 공군에 지원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봉사점수를 급하게 채우기 위해 헌혈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고 했다. 또 다른 엄마는 아들이 다른 군 복무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제대할 수 있는 육군으로 복무하는 것이 취업 준비에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육군, 공군, 해군, 카투사, 복잡하다. 어휴, 아들을 위해 군 복무를 엄마인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답답할 따름이다. 마냥 어려 보이는 저 녀석이 군대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요즘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사회의 첫걸음을 걷고 있는 청춘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20대를 보면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손님으로서의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나의 권리’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르바이트하는 어린 얼굴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고충을 먼저 떠올리고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 대입시킨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이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수록 그들의 서툰 실수와 잘못을 보더라도 예전처럼 ‘손님으로 권리’를 찾기 위해 지적하거나 따지지를 못한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줄 뿐이다. 그들의 실수로 조금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그저 웃고 만다.  아이들과 함께 나이가 들며 만나는 사회는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우리의 삶을 공유하는 곳이었다.


 몇 년 있으면 그토록 생소했던 군대마저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아닐 것이다. 결혼 전 직장을 다니며 바쁘게 살 때는 나 혼자만 잘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그저 살아가는 무대 배경이자 터전이지, 그다지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간단한 인사, 눈인사로도 충분한, 관심을 크게 두고 지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사회와의 연결고리들이 자꾸만 생기고 있다. 초중고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학교 일에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며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그저 남자의 의무라고만 생각했던 군대를 엄마의 눈으로 다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더 와닿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사회의 일에 연결될까? 나이가 들수록 나의 삶은 사회와 더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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