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일하기 싫어’라는 입에 달고 산다. 여름방학 내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좋아하는 책들을 뒤적이며 신선놀음을 즐기다 보니 또다시 뜨내기 강사의 삶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진 탓일지도 모른다. 땀이 주르르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 무거운 노트북을 메고 두 손 가득 수업재료들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걷는 생활, 힘들긴 하다. 문제는 이런 마음이 이번 여름이 되기 전부터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추우면 추워서,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그래, 인정한다. 이건 그냥 일하기가 싫은 거다.
갓 대학 신입생이 된 장남도 ‘학교 가기 싫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찬란했던 ‘대학 합격의 기쁨’은 정신없던 3월이 지나니 금방 사라졌다. 그토록 바랬던 대학생이 되어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시험공부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는 아들의 생활은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앳된 얼굴로 당당히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성인의 모습만 더해졌을 뿐이다. 매일 ‘학교 가기 싫어’, ‘시험 치기 싫어’, ‘공부하기 싫어’로 찡찡거리던 장남의 투덜거림은 여름방학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그리고 개강을 앞둔 요즘, 그 녀석은 또다시 ‘학교 가기 싫어’를 연발하기 시작한다.
아들은 본인의 ‘아무것도 하기 싫어’의 말투가 엄마를 닮아서라고 우겨댔다. 엄마의 ‘게으름’, ‘벼락치기의 습성’, ‘찡찡거림의 말투’ 등등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필요 없는 본인의 버릇들은 모두 엄마의 DNA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머릿속 80%가 모두 ‘잠’으로 채워진 저 녀석의 단순한 뇌 구조와 ‘세상사의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사는 복잡한 나의 뇌 구조를 비교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들아. 너는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다.
몇 년 새 습관처럼 내뱉는 ‘일하기 싫어’의 내 입버릇은 40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부쩍 잦아졌다.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는 신체와 기억력의 둔화를 느끼고, ‘젊은 강사’를 선호하는 학교 현장을 바라보며 점점 어려지는 청소년 아이들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할지에 대한 두려움들은 매년 더해만 갔다. 정신없이 바빴던 시절에는 몰랐던 소소한 불안들이 점차 수업들이 줄고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하며 커다란 고민으로 다가왔다. 수업을 준비하고 학교로 가는 도중에도 종종 생각한다. ‘아, 언제까지 강사 일을 할 수 있을까?’
갈수록 더해지는 불안과 걱정 탓에 어느 순간부터 ‘일하기 싫어’라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루는 남편이 말한다. “이제 돈 그만 벌 때도 됐어. 그냥 쉬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막상 일하지 말라니까 그것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요즘 나 자신도 잘 모르는 해답을 찾아 ‘걱정 계단’을 수천 개 올라가는 중이다.
그림책 <마음의 집>(김희경 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창비) 속에는 본인의 ‘마음의 집’ 속에서 헤매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어느 날 고양이를 보면 슬프다가도, 어느 날 고양이를 보면” 즐거운 사람이 있고, “어느 날 시계를 보면 기쁘다가도 어느 날 시계를 보면 화가” 나는 이가 있다. 때로는 친구와 다툰 후 “10 계단만 걸으면” 감정이 풀리는 아이가 있고, 엄마한테 혼난 날에는 “100 계단을 걸어도” 속상함이 안 풀린다고 불평하는 꼬마가 있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1,000 계단’ 수천 개의 걱정 계단을 걸어도 불안함과 쓸쓸함이 가시지 않을 때가 많아진다. 평온한 일상에 수많은 불안의 웅덩이들이 여기저기 고여있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마음의 정답이 아닐 때는 어떻게 할까? 나이가 들수록 드는 이런 걱정들은 앞으로 다가올 힘듦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까 싶은 두려움이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고 미래에 도사린 모든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다. 나 같은 소시민들을 위해 국가가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은 예전에 버렸다. 모두가 불안했던 코로나 시기, ‘각자도생’이라는 지혜를 이미 깨우쳤다. 그러니 어쩌랴, 일하기 싫어도, 지금은 일해야 한다. 아직 할 수 있는 한, 아직 버틸 수 있는 한. 버티고 버텨야 한다. 그렇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든다. 버티다 보면 다시 나아갈 힘이 되돌아올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나는 지쳤다.
이제 나의 일을 해야 할 날이
하루 더 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의 힘이 되돌아왔다.
그래, 밀물은 하루에 두 번 차오르지.
(찰스 레즈니코프)<출처: ‘시로 납치하다’/류시화/더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