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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21. 2024

<칼 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를 이해하고 싶다면’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를 이해하고 싶다면’

<칼 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지음 (2022, 문학동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중략) 그것은 출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하는 유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열정>(아니 에르노, 2024, 문학동네)에서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글쓰기 신념을 지닌 작가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에르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기면서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 있게,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했다"라는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불륜 경험을 소재로 한 <단순한 열정>을 그녀의 대표작으로 접한 독자라면 한림원의 이런 평가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에르노의 글은 내밀한 개인 경험과 사회적 영역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듯한 독특함 때문에 허구인지 아니면 진실인지에 대한 논쟁이 붙는다. 그런 면에서 <칼 같은 글쓰기>(아니 에르노, 2022, 문학동네)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촘촘하고 다방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문학 교수인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가 이니 에르노 사이에서 오고 간 메일을 모아 만든 대담집으로, 그동안 그녀가 걸어온 문학 궤적을 추적하며 글쓰기, 집필 방식, 문학관 등 다양한 면을 담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 이브토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 곁을 떠나 루앙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중등학교 교사, 대학 교원 등의 자리를 거쳐 문학 교수가 되었다. 작가는 점점 넓은 세계를 접하며 추구했던 삶과 부모의 소박한 삶과의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그녀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은 1974년,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으로 형상화되었고, 1984년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 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인 체험을 혼합한 작품들을 많이 썼다. 특히 그녀는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가 야기하는 일상적 차별의 양상을 예리하게 인식하지만, ‘거리두기’ 방식으로 지나치게 개인적인 서사에 매몰되기보다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 노력했다.


 <칼 같은 글쓰기>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세계를 분석한 대담집이다. 이 책에서는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 아니 에르노의 서문을 시작으로 21가지의 주제로 다양한 질문들과 대답들이 오가고 있다. 불문학 교수이자 소설가인 이브 자네는 “실존의 고통과 즐거움과 복잡함을 적나라하게, 뼛속까지 파헤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p.6) 에르노의 글쓰기가 본인의 방식과 달라 흥미를 느꼈다고 밝힌다. 그는 “아니 에르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그와 같은 작가적 입장을 취하도록 이끈 상황의 내적 동기를 듣고 싶었다”(p.8)라며 이 메일 교환을 시작한 이유를 소개하고 있다. 서신들을 읽다 보면 직접 만나서 이루어진 인터뷰가 아닌 탓인지 중간중간 아니 에르노가 이브 자네의 질문을 다시 파악하는 메일이 오가는 등 촘촘한 구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대담집은 30년 동안 축적되어 온 에르노의 작품 세계와 글쓰기 신념, 가치관 등을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브 자네는 에르노에게 글쓰기 방식, 시점, 자전적인 내용, 주제, 삶 등 다양한 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에르노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개념이다. 그녀는 ‘작품’, ‘작가’라는 닫힌 느낌의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글쓰기’, ‘책 쓰기’라는 좀 더 능동적인 느낌의 단어들을 선호한다. 에르노에 있어 문학은 단어와 글로 이루어진 ‘제조의 영역’이 아니라 ‘살과 피의 영역’이다. 에르노는 “한 문장 한 문장 실제 사물들의 무게를 싣고 단어들이 단어이길 그치고 감각이 되고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을 담고 “‘영구적인’ 하나의 리얼리티로 변형”(p.165) 시키는 글쓰기를 원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에르노는 자전적인 내용을 토대로 “주로 기억에 근거”(p.53)하는 글쓰기를 하지만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지와 말을 있는 그대로 따와서 묘사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확고한 글쓰기 방식을 지니고 있다. 에르노는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p.54)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거리두기’를 하며 쓰고 싶은 기억을 다듬어 주제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아니 에르노는 본인의 이상적인 글쓰기를 브레히트 문장을 빌어 “그는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타인들은 그 속에서 생각하곤 했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녀의 최종적인 글쓰기 목표는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꼈듯, 내가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p.58), 요약하면 개인적이지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글쓰기인 셈이다.


 <칼 같은 글쓰기>는 작가가 그동안 구축해 온 작품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해설집이다. 그동안 아니 에르노의 소설들을 접하며 의문을 품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작가의 글쓰기 신념을 이해하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담집이 촘촘하게 짜인 구성으로 이루어진 직접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오간 메일들을 모아 편집한 글이라 에르노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조금 미흡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아니 에르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 내면적 글쓰기와 사회적 글쓰기 방식의 형태를 좀 더 연구하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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