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교향곡>(앙드레 지드, 민음사, 2023)
“저는 지금 눈이 보이는걸요”
<전원교향곡>(앙드레 지드, 민음사, 2023)
‘만일, 갈라테이아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배우자로서 피그말리온을 원했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갈라테이아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만든 이상적인 창조물의 이름이다. 조각상이었던 그녀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실제 여성이 되었고, 창조자 피그말리온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피그말리온은 성이 문란한 키프로스 여성들을 보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조각에만 몰두하며 이상적인 여성만을 기다려왔다. 그로서는 본인이 조각한 순결하고 순백의 조각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진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갓 태어난 갈라테이아 역시, 피그말리온처럼 쉽게 감정을 가질 수 있었을까? 오히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저 맺어지고 만 비운의 여인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민음사, 2023)은 또 다른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빚어내는 엇갈린 운명의 형태로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스위스 산간 마을의 한 목사가 의지할 곳 없는 장님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내는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앙드레 지드는 20세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그는 1869년 프랑스 파리 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루앙의 유복한 사업가 집안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몸이 허약하고 예민했던 지드는 열두 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외사촌 누이 등 여자들에 둘러싸여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하며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1891년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로 문단에 데뷔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드는 1893년 북아프리카로 떠난 여행에서 동성애에 눈을 뜨고 모든 도덕적, 종교적 구속에서 벗어났다. 이후 그는 인간 내면에 관한 정직한 탐구와 종교적 색채를 담은 작품들을 많이 썼고 엄격하고 고전적인 스타일로 프랑스 문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1902년에는 <배덕자>를, 1909년에 <좁은 문>, 1919년에 <전원교향곡>을 발표했으며 194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드는 1951년 파리의 자택에서 폐 충혈로 세상을 떠났다.
<전원교향곡>은 중편소설 정도에 해당할 짤막한 길이의 작품으로, ‘첫째 노트’와 ‘둘째 노트’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인 ‘나’가 쓰고 있는 일기 형식의 이 글은 시각장애인 소녀 제르트뤼드를 어떻게 돌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거 회상으로 시작된다. 목사인 화자는 죽어가는 불쌍한 노파 옆에서 장님 소녀 제르트뤼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를 본 아내는 불평하지만, 그는 선의와 동정심으로 이 불쌍한 소녀를 정성껏 돌본다. 목사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소녀는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아름답게 성장하고 은인인 목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목사 역시 순백의 제르트뤼드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본인의 감정을 기독교적인 애타주의로 포장하며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 눈 수술이 성공하여 시력을 되찾은 제르트뤼드는 세상의 현실이 목사의 설명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그동안 본인이 사랑한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인 젊은 자크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이 엄청난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제르트뤼드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는 죽기 전에 강에서 건져 올려지지만, 모든 것을 목사에게 고백한 후 숨을 거둔다.
스위스 산간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목사와 제르트뤼드의 엇갈린 슬픈 사랑으로, 혹은 종교인이 고백하는 일탈의 감정 혹은 인간의 오감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다룬 글로도 읽힐 수 있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든, 이 작품을 독자의 마음에 기억될 만한 문학 작품으로 기록되는 요소는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의 도덕적인 위선과 종교적인 사랑이다. 지드는 등장인물인 마르탱과 목사의 논쟁을 빌어 인간의 오감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대해 이렇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내가 말하는 건 결코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말하려는 건 다만 이거야. 사람의 영혼은 도처에서 세상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망쳐 놓고 파괴하는 무질서와 죄악보다도, 아름다움과 안락과 조화를 더 쉽게, 더 즐겨 상상하고, 우리의 오감은 이 무질서와 죄악을 우리에게 알려 줌과 동시에 우리를 도와 거기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점이야. 그래서 나는 베르길리우스의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시구 다음에, 우리가 배운 ‘자신의 행복을 안다면’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불행을 모른다면’이라는 구절을 붙였으면 해. 불행을 모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p.232)
작가는 인간의 오감이 세상의 ‘무질서와 죄악’을 밝히기도 하지만, ‘아름다움과 조화’를 쉽게 인식시켜서 오히려 더 행복하고, 불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오감 중 ‘눈’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할 수 있는 잣대이다. 목사는 장님 소녀 제르트뤼드에게 “눈 뜬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모른단다.”(p.238)라고 설명한다. 그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진실을 살펴보기보다는 잘 모르는 상황을 “알아들은 체”하고 “부정확하고 그릇된 사실로 자기 머리”(p.243)를 채운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거짓과 허식이 오가는 세상에서 목사는 오로지 제르트뤼드만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순순하게 바라보며 “결코 알아들은 체 하지 않”(p.243)는다고 보았다. 그가 바라본 제르트뤼드는 볼 수 없어도 자연 속에서 ‘듣는 행복’을 아는 순수한 소녀였다. 실제로 그녀는 본인만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서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행복을 발견하며 매일 온화하게 꿈꾸며 지냈다. 그런 소녀에게 애정을 느낀 목사는 현실 속 아내 아멜리와 비교하며 본인의 감정을 합리화시킨다. 자신은 아내를 “끊임없이 그녀는 행복하게 이끌고 (...) 억지로라도 행복하게” 해 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고 여긴다. 목사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멜리는 씁쓸히 이렇게 읊조린다. “어떻게 하겠어요. 여보, 나는 장님으로 태어나질 못했는걸요.”(p.282)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리고 목사의 종교적인 위선으로 빚어낸 둘 사이의 안정과 평화는 언제 흩어져질지 모르는 거짓의 모래성이었다. 수술을 통해 눈을 뜬 소녀는 세상의 현실이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리고 동시에 본인의 감정이 목사의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 사랑 역시 헛된 신기루였다는 점을 깨닫고 절망하며 소리친다.
“제가 맨 처음으로 본 것은 우리의 잘못이었어요. 우리의 죄였어요. 아니에요. 반박하지 마세요. ‘너희가 만일 눈이 멀었더라면, 너희에게 죄가 없으리라.’ 그러나 저는 지금 눈이 보이는걸요…. 일어서세요. 목사님. 여기 제 곁에 앉으세요. 제 말을 끊지 말고 들으세요. 병원에 있는 동안, 저는 제가 아직 알지 못하고 목사님도 읽어 주신 적 없는 성경 구절을 읽었어요. 아니, 읽어 달랬어요. 하루 종일 되뇌었던 성 바울의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나요.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p.302)
시작부터 진실되지 못했고, 솔직하지 못했던 이들의 사랑 결말이 비극으로 맺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작품 속에서 목사는 종교인의 사랑과 동정심으로 장님 소녀 게르트뤼드에 대한 본인의 감정을 속이고 계속 위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거짓은 소녀가 눈을 뜨고 바라본 이가 마음속 인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만 전해주던 이 세상은 눈을 뜬 순간 이후 죄가 가득한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게르트뤼드에게 ’눈이 보인다는 사실‘은 거짓과 진실을 구분 짓은 선악과가 아니었을까?
<전원교향곡>은 목사와 장님 소녀 게르트뤼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절제되고 간결한 문체 덕분에 가독성이 좋은 작품이다. 두 인물의 내면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서술기법은 인간 심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부분이다. 하지만 중년의 목사와 어린 장님 소녀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불편하게 볼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깊이 탐구하고 싶은 독자나 앙드레 지드의 문학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