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미래> 나오미 배런 지음 (2025, 북트리거)
15세기 독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독점했던 지식체계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르네상스, 종교개혁 등과 같은 새로운 혁명을 끌어냈다. 특정 계급의 성경이 다수의 지식으로 공유되면서 지식의 빅뱅을 만들어 냈듯이, AI를 이용하면 누구나 그럴듯한 글 한 편 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디지털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기술들은 ‘인간을 단조롭고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킨다’라는 목적으로 발달되었다. 하지만 본인의 일자리가 대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고뇌와 투쟁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었다. 또다시 ‘인간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오픈 AI사 챗GPT의 등장은 글 쓰는 많은 ‘휴먼’들의 두려움과 불안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글쓰기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전하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인 나오미 배런은 인문 교양서 <쓰기의 미래>(2025, 북트리거)에서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글쓰기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 나오미 배런은 1946년 뉴욕 출신으로 스탠퍼드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아메리칸대학의 언어학 명예교수인 그녀는 언어학자로서 기술이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탐구해 왔다. 저자는 컴퓨터를 매개로 한 소통, 글쓰기 기술, 사회적 맥락에서의 언어, 언어 습득 및 영어 구사의 역사, 인간의 멀티태스킹 행동, 대학생의 SNS 사용 등에 관심을 가지며 급변하는 기술 환경과 연계하여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2023, 어크로스)에서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부터 인터넷까지 매체별 읽기 전략을 제시했던 저자는 <쓰기의 미래>에서는 인공지능이 인류의 언어활동에 끼친 영향력을 다양하게 모색하며 인간의 글쓰기가 지닌 고유성과 가치를 부각한다.
이 책은 “AI가 작가로서 우리의 능력을 점점 키워 주어 우리가 이 도구와 생산적인 협력 관계를 맺도록 하는 길이다.”(p.53)라는 주제의 큰 줄기로 총 4부에 걸쳐 내용이 전개된다. 1부가 문자의 출현과 함께 인간이 다져온 글쓰기 행위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다. 2부와 3부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AI가 인간의 쓰기 영역에서 활약하는 상황과 이로 인해 생겨날 고용과 노동자의 업무 만족감에 미칠 잠재적 영향과 더불어 생성형 AI의 다양한 창의적인 가능성까지 전하고 있다. ‘컴퓨터가 우리와 협력한다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4부는 AI가 일상의 필자들을 돕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살펴보며 디지털 시대를 맞은 인간의 ‘쓰는 행위’의 의미에 깊이 고찰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AI와 협력을 통해 인간의 글쓰기를 향상한다는 관점에서 휴먼즈인더루프(Humans in the loop)라는 개념을 검토하며 인간의 글쓰기에 부여한 의미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는 깊이 새길만 하다.
이제는 AI와 ‘원치 않아도’ 상생과 공존을 피할 수 없는 때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성을 넘어서고 인간 본연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글쓰기까지 능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도구는 도구’ 일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기계는 뇌와 동일하다’라는 결론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기계 또한 ‘생각과 감정’을 가져야 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그것이 썼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p.346)하지만, 현재로서 AI가 그런 기준을 충족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런 불안을 가지기보다는 인간의 글쓰기 능력에 관해 좀 더 고찰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빠르고 편리함을 앞세우며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글들을 그대로 옮기고 활용하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걸쳐 글을 고치고 퇴고하는 시간을 좀 더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글쓰기는 인간의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고, 다른 사람과 이어주는 마법의 검이다. 아무리 도우미로서의 AI가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 검이 빛을 발하도록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p.517)
AI를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인공지능 결과물에 무임승차하는 ‘표절’이다. 챗GPT의 결과물을 그대로 베껴서 리포트를 작성하고 글을 쓰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저자는 이로 인한 저작권 분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효율적이고 편한 방법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도출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자동 페달 자전거를 타고 언덕 경사로를 오르는 식으로 도움을 받는 것과 자신의 능력과 목소리를 훼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p.507)라고 주장한다. “쓰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행위”이기에 “오타가 있거나 서툰 문장이라고 해도 나의 글은 내 마음과 내 체험에서 흘러나왔다”(p.515)라며 쓰는 주도권을 잃지 말기를 당부하는 그녀의 마지막 호소가 인상 깊다.
생성형 AI에 관한 저자의 끝없는 고민은 인간이 왜 현명하고 통찰력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지, ‘인간은 왜 쓰고 다시 고쳐 쓰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글쓰기 고민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 시대, 신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생각을 키우고, 본인 글쓰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라는 그녀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AI와 공존하며 본인만의 글쓰기를 탐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듯싶다. 하지만 55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과 AI의 발전 과정에 관한 다양한 예시들은 일부 독자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글쓰기의 본질을 고민하며 미래 글쓰기의 방향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