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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Mar 10. 2022

3. 제국의 수도였던 적이 없는 도시, 소주

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제국의 수도였던 적이 없는 도시, 소주


나는 공업원구에서 생활한지 몇 달이 지나서야, 십 분 정도 거리에 소주 고성古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처음 십전가十全街를 거쳐서 소주성 안의 길을 걸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왜 이런 도시가 있는지 몰랐었던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던 날이었다. 


 

소주의 운하와 집들


소주의 역사는 2500 여 년 전, 춘추시기로까지 올라가는데, '동주 열국지'에서 나오는 ‘오월동주’, ‘와신상담’같은 고사성어의 배경이 되는 땅이다. 소주고성은 춘추 시기, 오왕 합려 때 오자서가 축성했다. 소주성의 모양을 살펴 보자면, 성은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고 성 밖은 폭이 넓은 해자로 둘러싸여있다. 소주성 서쪽엔 항주에서 올라와 진강镇江으로 이어지는 경항대운하가 있다. 수나라 때 본격적으로 건설된 대운하 때문에 소주의 경제가 번영을 누렸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소주기차역 주변이나 소주성 밖을 조금만 나가도 현재에도 바지선이 드나드는 큰 운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소주의 운하는 항주와 북경을 연결시켜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원나라 이후 소주는 해군 기지였으며, 근세에 상해가 항구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국제적인 무역 항구이기도 했다. 비교적 내륙에 치우쳐있는 소주가 어떻게 무역항구였을까? 무역품은 소주 외곽의 운하 부두에서부터 출발해서 오송강吴淞江을 통해 바다로 나갔다. 그 유명한 정화의 원정대가 출발한 항이 소주 외곽의 운하에서였다. 정화 원정대는 소주 운하를 빠져나가 동지나해로 나간 다음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소주성은 원래 6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창문, 반문 서문은 지금도 남아있고, 봉문과 누문은 1958년 해체되었다. 성문 중, 반문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여섯 개의 수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유일하게 거의 완전한 상태로 현존하는 수륙 성문이다.  반문풍경구엔 서광탑, 수륙성문, 오문교 등이 있다.  당나라 시대에 소주자사刺史를 역임한 백낙천은 “붉은 난간, 390대의 다리”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송나라 때의 ‘평강도’平江圖에는 359개의 다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당에서 송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평강도는 남송 1229년,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가장 상세하고도 정확한 도시 평면도이다. 높이 2.76미터에 너비 1.48미터로서로서, 송나라 당시 소주성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소주 문묘에 보존되어있다. 이 평면도에 새겨진 다리 수는 350여 개에 달하고 사당과 전당은 250여 곳에 달한다. 평강도는 당나라의 장안이나 원나라 대도(북경)처럼 원형 핵 모양으로 기획된 북방 도시와는 다른 형태의 고대도시 구조를 보여준다. 네모반듯한 구조로 기획한 것은 이 지역이 종횡으로 물길이 나 있는 수망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소주는 흥성과 쇠락을 몇 차례 겪으면서도 여전히 번화했고 구조도 그대로 이어졌다. 비교적 심각했던 역사적 파괴는 진나라 말기와 금나라, 몽골과의 전쟁이 있었던 남송 때였다고 한다. 소주성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될 때마다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었는데, 수로망과 도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곳에 중건하는 것이어서 도시 회복이 신속히 되었고, 거리 지역 명칭은 모두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소주는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과거의 모습이 잘 보존된 중국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이다. 소주는 송과 원,명,청 시기를 걸치면서 부유한 개인들의 정원인 원림 문화를 발전시켜서, 지금의 '정원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다. 

      




소주성 안을 보자면, 작은 물길 상하좌우로 나있으며 사람과 차가 다니는 길도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가 비교적 잘 되어있다. 동서방향의 주요도로로는 십전가十全街 와 경덕로景德路가 있다. 십전가엔 비단 소품 가게와 술집이 여러 곳 있고, 다른 소주 거리처럼 장랑長廊이 있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남북으로 난 주요도로로는 평강로平江路와 소주성을 관통하는 인민로人民路가 있다. 강남수향 정취가 물싼 풍기는 평강로 주변엔 예쁜 카페나 가게가 많아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또 관전가觀前街는 수 백 년 전부터 소주의 대표번화가이고, 길 중심에 도교사원인 현묘관玄妙观이 있다. 현묘관은 서진 276년에 도관으로 창건되었는데 강남 일대에서 현존하는 최대 송대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청 황제들은 대운하를 통해 강남순방을 했고, 관전가, 십전가, 한산사 등엔 모두 황제들이 다녀간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건륭제는 순방시 보았던 항주와 소주의 풍경이 좋아서 북경으로 돌아간 후 이화원에 소주가를 만들도록 했다. 관전가의 대표 음식점으로는 송학루松鶴樓이고, 주홍흥朱鴻興, 득월루得月樓 등이 있는데, 자신들의 가게를 대표하는 대표메뉴가 있다. 이런 가게 말고도 다른 지방의 유명 음식점의 분점도 여러 곳 있다. 소주의 유명 관광지는 북쪽, 소주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쪽에 몰려있는 편이다. 하지만 덜 알려진 곳에 가도 방문객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을 수 있는 원림과 고건축물은 많이 있다.      



내가 소주성 안을 걸어다녔던 때는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상해나 다른 도시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인터넷에서 열차 시간표를 검색해서 동네의 기차표 부쓰에 가서 일일이 표를 예약하곤 했었다. 당시엔 중국이 일상생활에서 현금 없이 ** 페이로 움직이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앱으로 모든 과정이 이뤄지다 보니, 기차 표를 사람이 일일이 예약을 받던 작은 부쓰는 도시에서 사라졌다. 거지가 동냥을 해도 **페이로 돈을 받는 다고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소주를 생각하면 머리 위엔 ‘동오’東吳 깃발들이 나부끼면서 귓가엔 2000 년 전의 옛날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 복수에 일생을 건 사나이와 여색에 빠져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가 나라를 내주었던 사나이 그리고 비단을 짜던 여자들. 


나는 이런 질문을 해봤다. ‘근데 난 소주라는 도시를 왜 그때까지 몰랐었을까?’ 나는 중국에 오기 전에 내가 알았던 도시를 꼽아 봤다. 북경, 상해, 홍콩, 하얼빈, 천진이 생각났다. 하얼빈이나 천진 같은 도시는 우리의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보니 그 이름을 들어본 도시였다. 또 나는 실크로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기 때문에 서안(장안)과 우루무치도 알았다. 임어당의 ‘유쾌한 천재’라는 책을 읽어서 항주도 알았다. 그런데 소주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소주는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도시였었다. 흔히 중국을 이야기할 때 중국의 과거를 말해주는 5대 고도故都가 있다고 한다. 북경, 서안, 낙양, 개봉 그리고 항주(남송의 수도)이다. 소주는 제국의 수도였던 적은 없었다. 춘추시대 패자 반열에 올라선 오나라의 도성일 뿐이었다.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소주는 항주와 남경, 상해 뒤에서 조용히 있었던 도시였지만 천년의 세월 동안 강남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소주의 문화적 배경 뒤엔 소주가 비단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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