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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Mar 17. 2022

10. 장사성 대 주원장

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10. 장사성 대 주원장


원말명초 교체기에 소주 출신의 문인 고계高啓가 지인, 주검교周檢校의 집에 초대받아 들렀다가 연회석 상에 나와 춤을 추고 고려말로 노래를 부르는 조선의 어린 소녀를 보고 주검교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주검교는 자신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건적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배를 골고 있는 어린 소녀아이를 돈을 주고 사서 소주로 데려왔다고 했다. 고계는 그 날의 감상을 '조선아가朝鮮兒歌'란 시로 남겼다.  


< 조선의 아이 검은 머리

방금 잘라 두 눈썹 위에 가지런한데

잔치 자리에 방금 불려나와 마주보며 노래하고 춤춘다.

무명 겉옷 부드럽게 두르고 고리고리 늘어뜨리고

가벼운 몸 빙빙돌리고 가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달 출렁이고 꽃이 흔들림은 취중에 보이는 것이라

조선말 노래지만 어찌 통역이 필요하겠는가?  

   

깊은 정은 고향 떠나온 한을 호소함을 알겠노라

노래를 끝내고 손님들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데

까마귀는 우물가에서 울고 촛불만 타오른다.

.....

4월의 왕성은 익은 보리조차도 귀해져

두 조선 아이는 길가에서 배고픔에 울고 있었소

지니고 있던 황금도 모자라 짐보따리 모두 털어

밥을 구해 먹으면서 다행히 배를 타고 이곳에 왔소. >    


전란속에 부모 없이 떠돌다가 까마득히 먼 이국에 내던져서 연희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조선의 소녀이야기에 잠시 마음이 촉촉하다.


원 말기, 장기간 지속된 한족에 대한 억압은 마침내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종교에 기반을 둔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는데, 홍건적은 중원을 휩쓸고 고려에도 침공을 해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그러다가 천하는 점차 3 명의 군웅들로 정리되었다. 진우량(陳友諒, 1316년-1363년)이 있었고, 후에 명태조가 되는 주원장(朱元璋 1328-1498)도 있었다. 또 강소성江蘇省  남쪽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갔던 장사성(张士诚 1321-1367)도 있었다.

     

홍무제 주원장은 아주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온갖 탐관오리들을 보면서 자라다가 민란의 주동자가 되어 왕이 되었다.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천성이 까다롭고 잔인했으며,  성정이 강퍅해서 주위 사람을 들들 볶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나 가로채야 할 것이 있으면,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주변인을 죽여버렸다. 사람을 다양하면서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취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장사성은 강소성 북쪽 염성盐城에서 태어나 염전 노동자로 일했던 공인이었는데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일하던 일꾼들을 규합하여 스스로 세력을 이뤘다. 장사성은 역사상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소주와는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현재 소주성의 북쪽, 소주기차역과 멀지 않은 곳에 소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망이 좋은 북탑보은사北塔報恩寺가 있다. 보은사는 소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위,촉,오가 서로 겨루던 삼국시대 238년부터 251년에 사이에 건립되었고, 북사탑은 500년대 초반 건립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재건과 보수를 거쳤다. 북사탑에 올라서면 하얀 벽에 까만 기와를 얹은 강남식 집들이 늘어선 소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또 탑주위엔 장사성기공비张士诚纪功碑가 있다. 내가 북사탑 주변을 돌아보던 때는 장사성이 누군지 알지 못해서 그런 유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장사성은 주원장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소주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소주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는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그 당시엔 다른 도시와 비교하여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그곳에 나름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그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천하의 판세가 결정되기 전, 소주의 민심은 장사성 편에 기울었다. 오월지방의 상인들과 지식인들은 장사성 편에 가담했다. 시내암과 나관중도 장사성 군의 군사를 지낸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결국 천하 삼분지계처럼, 호북 쪽에 근거지를 둔 진우량, 오월 지역의 장사성, 남경 주변이 주원장이 세력을 다퉜다. 하지만 천하의 운은 주원장 쪽으로 기울었다. 장사성은 민심도 등에 업었고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운 오월 지역을 기반으로 했음에도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장사성의 동생, 장사덕이 어이 없이 주원장 쪽에 사로 잡혀 죽는 바람에 장사성은 큰 손실을 입었다.  


주원장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진우량이었는데, 병사와 배의 수가 열세여서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파양호鄱陽湖 전투(1363)에서 주원장이 진우량을 이겼다. 장사성은 주원장과 진우량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진우량과 연합하여 주원장에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장사성이 나중에 스스로 후회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장사성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평가한다.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중국1367년에 소주가 함락되면서 주원장 군대에 잡혔다가 자살했다. 후세사람들은 장사성을 민심을 얻고도 천하를 얻는 데 실패한 군웅이라고 했다. 주원장은 그의 성격대로, 장사성을 격파한 후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주 지역에 대해 복수했다. 그는 장사성의 참모들을 참수하고 그 시체는 거리에 버렸다. 또한 그곳의 관리, 군인, 재산가 들과 그 가족 30만 이상을 추방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마지막으로 소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세율을 책정해 이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다. 


물론 주원장에겐 새 나라를 연 황제 답게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리고 반란군 시절부터 탐관오리는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혼란했던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나갔다. 또 재상을 없애고 문신들을 장악하여 권력이 황제의 수중으로 들어오도록 집중시켰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면이라면 당연히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점이었다. 집권 후반기엔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셀 수 없는 많은 공신들을 죽였다. 


집권 말기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손자를 책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주원장은 태손이 공신과 중신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얼마 남지 않은 공신과 중신들마저 꼬투리를 잡아 죽여서 원혼을 만들었다.  하지만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이 없기를 바랬던 명태조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주원장이 죽은 후 그의 명령으로 북평(현 북경) 지역을 맡고 있던 4째 아들, 주체朱棣가 2대 건문제建文帝를 힘으로 내쫓고 왕이 되었으니, 영락제永樂帝이다. 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평, 즉 현재의 북경으로 옮겼다.

명의 초기 왕실 역사는 조선 초기 삼촌,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빼앗은 역사와 매우 흡사하다. 이후에 조정에 불어 닦친 선비들의 사화士禍 역시 비슷했다. 단 큰 나라답게 한 두 번의 사화로 영락제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수 만명에 이를만큼 많았다.  



왕이 되기 전의 주원장과 어화 속의 주원장


어화御畫에 나타난 주원장의 얼굴은 기품있고 위엄있어 보이나 실제 그가 임금이 되기 전에 그려진 그림 속의 얼굴은 기괴한 추남이었다. 중국 수 천 년 역사에서 한고조 유방보다 더 운세가 좋은 사나이로 꼽히면서, 동시에 역대 왕들 중에서 못생기기로 첫 손에 꼽혔다.


어쨌든 명은 이민족인 몽고족으로부터 다시 한족이 나라를 되찾아온 나라였다. 명의 전체 역사를 놓고 볼 때 명 초의 황제들은 이전 당송대 시대의 제도를 부활시켜 과거제를 시행했고, 관료제도와 군사체제를 정비했다. 강남의 선비와 지식인들을 거의 학살에 가까운 숫자만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이 발달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하여 소주와 항주 일대의 경제는 크게 부흥했다. 그러나 주원장이 길을 열어서 비대해진 황권은 명대 중엽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부패와 파벌이 나타나고, 환관들이 활개치면서 왕조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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