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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Mar 10. 2022

9. 산당가山塘街와 지식인들

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9. 산당가山塘街와 선비들


다시 산당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천 여 년 전에 만들어진 산당운하는 소주 도시 문화에 큰 기여를 했다. 산당가에서 호구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점점 잦아들고, 점차 소주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동네가 나온다. 하지만 평범한 집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소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협서회관陝西會館이나 오인묘五人墓, 남사기념관南祠紀念館 같은 유적지가 있다. 이제는 한 두 군데민 남아있다는 회관은 산당가가 과거 외지 상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상업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오인묘나 남사기념관은 소주 선비들의 의기意氣를 나타내주는 유적지이다.     

 

한적한 산당운하 길



  

오인묘는 명나라 말기에 활약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오인을 기린 묘이다. 

명말 정치사의 핵심은 희종 천계天啓 연간(1621-1627)에서는 환관 위충현과 동림파 간의 대립이었다. 환관 위충헌魏忠賢은 권세를 잡아 악행을 일삼았는데 이들을 엄당阉党이라고 불렀다. 이 엄당에 대항한 선비들의 집단이 동림서원에서 발원한 동림당東林黨이었다. 당시 강남 각지의  사인士人들이 무석의 동림서원에 결집했고, 혼군에 의해 망가진 명 조종을 바로 잡기 위해 방향을 모색했고 자신들의 의견을 출판해서 알렸다. 그들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이 북경의 조정을 좌우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소주에서는 동림당에 이어 복사復社(1629년 연간)의 결성대회가 있었다. 복사 역시 환관과 세도가에 맞서 싸우는 명말의 문학적 결사 단체였기에, 위충현을 따르는 무리들과는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소주 출신이자 동림당인 주순창周順昌이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핍박으로 옥중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주 사람들, 특히 복사復社 참가자들이 주순창의 안타까운 죽음에 상심하여 모여서 곡을 하고 모금을 하였다. 그러자 위충헌과 한 패인 순행관리가 소주 사람들의 폭동 동향을 조종의 위충현에게 보고했고, 결국 다섯 명의 소주 지식인들이 잡혀 들어가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 다섯 사람이 안패위顏佩韋, 양념여楊念如, 마걸馬杰, 심양沈揚, 주문원周文元으로 오인묘에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사형 당시 다섯 사람의 목은 교수형에 처해진 뒤 성 위에 걸렸는데 죽는 순간까지 밝았던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소주의 현사賢士, 대부大夫인 오묵吳黙 문진맹文震孟 전겸익钱谦益 요희맹姚希孟 구식사瞿式耜같은 사람들이 거금을 들여 그들의 머리를 사서 나무 상자에 안치하고 마침내 그들의 머리와 시체를 맞추었다. 후에 지금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1. 간사한 인상의 환관 위충현 , 2 동림서원 패방 3. 오인묘를 만드는 데 참가한 문진맹文震孟이 살던 예포艺圃


오인묘를 조성한 사대부 중에 문진맹과 요희맹은 숙부 조카의 관계이고 함께 자랐으므로 모두 문진맹 집안으로 봐야한다. 전겸익은 후에 명나라가 망하자 반청운동에 참가했던 강남의 많은 사대부들과 달리 청나라 조종에 들어가서 대신이 되었다. 반면 구식사는 남방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남명의 군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계림에서 남명의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가 죽었다. 

문진맹은 문진명文徵明의 증손자로 명이 망하자 부흥운동 중에 자결하였다. 문진맹의 집안과 벗들 중에 명이 망하자 자결하거나 반청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여럿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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