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8. 산당가山塘街와 백거이
산당가는 소주성의 서북 쪽에 있는 창문阊门에서 서북쪽으로 7리 길이로 뻗은 길이면서, 춘추시기에 소주성을 건축한 합려의 신화가 서려 있는 호구虎丘로 가는 길이다. 호구는 합려의 무덤이자 소주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합려는 죽을 때 명검 3000자루를 함께 묻어다고 하는데 진시황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도 호구에 찾아와서 발굴하였지만 끝내 못 찾았다고 한다.
산당가가 시작되는 창문阊门 옆은 여러 물길이 모였다가 갈라지는 혈穴과 같은 곳이다. 소주성을 둘러싼 외운하 물길은 그 물길대로 이어가고, 서북 방향과 서쪽 방향으로 무려 두 개의 새로운 물길이 트인다. 서북 방향의 물길이 산당운하 물길이고, 서쪽으로 난 물길은 한산사로 이어진다. 한산사로 이어진 물길은 그대로 경항대운하의 물길로 곧바로 합쳐진다. 항주에서 올라온 대운하 물길은 태호와 소주 사이를 지나 진강镇江과 양주扬州로 이어진다. 소주를 기준으로 보자면 경항대운하는 소주의 서쪽을 지나 가는 셈이다.
산당가는 백거이 기념관이 있는 시작 부분부터 약 사 백 미터 안에 음식점과 까페,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있는 편이다. 산당가 운하에서 안쪽에 있는 산당노가(山塘老街 산탕라오지에)에는 값비싼 음식부터 저렴한 주전부리까지 먹을거리가 넘치고, 세상 향기로운 찻집부터 고금의 장인들이 만든 공예품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 옛 시절에 깔아놓은 석판이 아직도 남아있는 길이기도 하다. 옛 소주의 기억을 소환하고 싶다면, 옛 소주의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산당가에 가볼 일이다.
현대의 산당가는 평강로, 관전가와 함께 소주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번잡한 관광거리여서, 산당가 길 위에 서서 호구나 다른 역사 유적지에 관심을 둔 적은 없다. 산당가에 가면 늘 뭘 먹을까, 혹시 가게에서 파는 골동품 중에 진짜 값나가는 물건을 내가 건질 일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주로 했다. 길거리엔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번잡하면서 심각한 생각에 잠길 틈이 없다.
산당가의 끝, 호구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고, 산당가 입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갈 수도 있다. 나는 산당가 입구에서 호구까지 산당하를 따라 쭉 걸어봤다. 가면서 사람들이 사는 정겨운 뒷골목까지 돌아보면서 갔더니 막상 짙은 노란 담장의 호구 유적지앞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이 나서 문 앞에서 주저앉아 쉬었던 기억이 있다.
산당가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당나라 시인이자 행정가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이다. 백거이는 825년, 소주자사苏州刺史로 부임하여 호구와 소주성을 연결하는 길이 대략 3,600 미터에 이르는 산당하山塘河 운하를 뚫었다. 성에서 주변지역으로 가는 운하길이 늘어나자 소주의 백성들은 감격하여, 백거이가 다른 지방으로 이임한 후에, 산당가를 백공제白公堤라 불렀고, 백거이를 기리는 사당, 백공사白公祠도 설립했다. 백거이는 소주에 부인하기 전에 항주자사로 있을 때에도 서호西湖의 치수 사업에 참여하여 제방을 쌓았었다. 서호에 가면 서호를 반으로 나누는 그 유명한 소동파가 쌓은 소제蘇堤와 함께 백제百提 위를 거닐면서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보통 사람에겐 평생 관리로 일하면서 백성을 위해 운하를 건설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백거이는 수많은 시를 지어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실로 놀라운 인생이었다. 중국 문학사상 최대의 천재인 이백을 보자. 역사가 인정하는 천재도 좋지만 말년에 도교 심취하여 산에 들어가 취중 도사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따라가고 싶지도 않은 경지이다.
또 다른 시인인 두보는 당나라의 혼란기에 태어나 평생 전란에 쫓기며 가난하게 살았다. 사후에 얻은 시성詩聖이라는 명예도 좋지만 살아가면서 그가 당한 불운과 고난을이란.... 두보의 신산스런 삶 속에서도 사천, 성도에서 친구이자 후원자 덕분에 안정적으로 살았다. 생활이 안정되자 두보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는 싯귀로 유명한 아름다운 시도 지었다. 하지만 중년의 두보가 그렇게 편안하게 산 시절은 겨우 이 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 겨우 이 년.
두보나 이백에 비하면 백거이는 모범적이고 운이 충만한 일생을 보냈다. 천재 소동파도 너무 잘난 나머지 중앙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평생을 떠돌았다. 그것에 비하면 백거이는 적당히 자신을 자제하다가 가끔 옳은 소리를 해서 이, 삼 년이 짧은 기간 동안 한직에 머무는 불운을 당하는 정도였다. 그는 다시 조종에 등용되어 평생을 관리로 살았다. 백거이는 은퇴한 후 낙양에 집을 마련하여 문학에 정진하면서 인생 마무리를 했다. 그의 문장에 대한 태도에 그의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백은 시를 쓸 때 한 잔 술에 막힘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하며, 두보는 열 번의 손질을 했다고 한다. 반면 백거이는 시를 탈고할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노파가 알아들었는지를 묻고, 만약 모르겠다고 하면 그녀가 뜻을 알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친 후에야 비로소 붓을 놓았다고 한다. 또 시인이면서도 사회운동가이자 행정가였던 백거이는 문학은 통속적이면서도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졌었다. 백거이는 문장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것에 맞춰 써야 하며, 문장은 문장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자라면 거의 까막눈에 가깝고 평소에 한시를 거의 읽지 않는 나였지만 백거이의 문학관에 호감이 생겨 백거이의 대표작을 찾아봤었다. 그의 대표작인 비파행은 내가 어린 시절에 많이 밨던 통속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정감이 짙었다. 잘 나가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기녀와 조종의 미움을 사서 귀향을 온 사내가 배 위에서 만나, 모처럼 비파 소리를 들으며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백거이는 시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으로써 반드시 아는 사이이어야 하는가’라는 소박하고 친근한 품성의 말을 남긴 사람이었다.
또 백거이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문학을 전달하려 했다. 양귀비와 당현종의 애정을 그린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이다. 백거이가 이렇게 대중적인 사랑이야기를 시로 써낸 것에 대해서 후세 조선의 유가 선비 중엔 점잖치 못한 창작이라고 흠을 잡는 이도 있었다. 백거이가 중당中唐시기에 시로 그린 사랑 이야기는 청시대 희곡, 장생전長生殿의 형태로 뒤살아나, 오늘날에도 경극의 주요 레퍼토리이다.
백거이의 호는 ‘낙천’樂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주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의 인생은 천년 번영 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꾼 소주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