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7. 오와월- 물의 노래
전체적으로 보면 부차의 무리한 야심이 오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볼 수있다. 부차의 허영심과 야심은 건설사업을 통해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부차는 서시와 애정행각을 벌였던 때에 태호太湖 옆에 있는 영암산에 관왜궁馆娃宮이라는 별궁을 지었다. 별궁엔 항아리를 묻고 나무와 양탄자를 깔아 서시가 걸을 때마다 땅속의 항아리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는 장랑이 있었는데 남아있지는 않다. 대신 합려가 만들기 시작하여 부차가 완성했다는 고소대姑蘇臺가 지금도 남아있다. 부차는 별궁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른 지방에서 운하를 통해 운반해왔는데 영암산 앞 두渎운하에 목재들이 삼 년이나 떠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암산 앞에 있던 마을 이름이 목독(木渎mudu)가 되었다. 목독 고마을은 2000 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강남의 수향 마을이자 원림으로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수향마을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찾는다. 내가 목독고마을에 갔을 때는 소주 시내에서 버스를 한 시간 즘 타고 갔는데 이제는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다.
목독고마을은 현대에 관광 외에 역사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고고학적 발견 때문이다. 옛 학자들은 지금의 소주성이 바로 오자서가 설계하고 합려가 만든 오나라 성이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다른 학설도 제기하고 있다. 낮고 습한 곳을 피하고 구릉을 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읍 설계의 기본인데, 지금의 소주성은 완전히 평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고대의 도성 터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소주시 서남쪽, 영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성터가 바로 오나라의 도성이라고 추측했다.
2010년 영암산 일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큰 성터를 발견했다. 목독춘추고성이다. 이 성은 옛문서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데 바로 태호로 들어가는 물길을 끼고 영암산의 줄기를 배후에 두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의 규모는 20제곱킬로미터가 넘어 기록에 등장하는 것보다 더 크다. 과연 이 성이 춘추시대 오나라의 것 그대로인지, 아니면 그것을 기반으로 전국시대 초나라가 증축한 것인지는 아직 연구중이라고 한다.
옛날의 역사가들은 합려의 성품을 잔인하고 여자와 재물을 좋아했다고 평했다. 합려와 대결을 벌인 구천은 범려로부터 ‘고난은 같이 해도 좋은 날은 함께 할 수 없는 이’라는 평을 들었다. 오죽하면 대업을 이룬 범려가 모든 논공행상을 거절하고 스스로 몸을 낮춰 사라졌을까. 합려의 아들인 부차 역시 허영심이 많았고 전쟁과 토목공사, 특히 운하를 만드는 공사를 밀어부쳐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다. 당시 영암산에 올라 태호를 내려다보던 부차가 활을 들어 화살을 쏘면 화살이 날아간 방향으로 병사들이 운하를 만들었다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져 온다. 그러고 보면 운하 건설에 정열을 쏟은 왕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좋지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부차의 야심이 만들어 낸 운하에는 긍정적인 결과도 있다. 흔히 후에 통일 제국을 세운 수나라의 양제가 남방의 식량과 비단을 북방의 수도에 쉽게 운송하기 위해 항주에서 낙양까지 경항대원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그 시작은 부차로 봐야 한다. 춘추좌전은 부차의 오나라가 한邗(지금의 양주)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서 장강과 회하를 소통시켰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회하와 장강 사이는 지대가 낮고 평탄해서 호수가 그물처럼 이어져 있으면서 회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지역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 한邗만 뚫으면 장강과 회하를 연결하여 장거리 운하로 만들 수 있었다. 운하 뚫는 일에는 도가 튼 오나라 사람다운 발상이랄 수 있다.
B.C 486년 경 부차는 중원 국가들, 특히 제나라를 침략해서 북방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욕으로 장강과 회하 사이에 운하, 한구(邗溝 한거우)를 팠다. 또 B.C 360 년, 위魏나라 혜왕이 황하와 회하 사이에 홍구鴻溝를 축조했다. 부차가 건설했던 운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부차가 구상한 대운하의 개념은 오늘날의 대운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후대의 수양제는 양주를 너무 사랑하여 운하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과 쏟아부었다. 수양제 이후에도 후대인들은 계속 운하를 발전시켜 황하부터 항주를 품은전단강을 연결하는 오늘날의 운하를 만들었다.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오나라의 야심이 뜻하지 않게 중국에 남북 대운하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수당시기를 거치면서 운하로 강남의 여러 지역이 더 좀촘하게 연결되고, 대운하로 강남과 중원이 열결되면서, 소주 천년 번영의 근간이 세워졌다. 이후 명청 시기에 소주의 경제력은 양주와 장안을 능가했다. 원, 청, 이민족 왕조가 중원을 호령했던 시절에도 강남, 특히 소주(苏州)와 항주는 당대의 경제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오와 월의 전설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역사가 간신으로 평가하는 두 사람에 대해서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백비는 오자서처럼 초나라 출신 망명객이었다. 백비 집안 역시 비무기의 모략질 때문에 부친과 형이 죽임을 당하고 본인과 일족들은 간신히 오나라로 망명을 왔다. 백비의 망명에 대해서 오나라의 대신 중에서 받아들이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와있던 오자서가 받아들이자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함께 초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했었던 것 같다. 오자서가 망명한 백비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그 유명한 ‘동병상련’이라는 고사이다. 백비와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자신의 뼈와 살 같은 가족이 몰살당할 고난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충신으로 살았지만 백비는 오와 월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비무기는 백비에 비해서 더 확실하게 간신이었다. 아부와 거짓으로 왕의 최측근 자리에 오르고, 오자서와 백비집안을 가증스러운 술수로 멸문지화로 몰고간다. 나는 비무기나 백비 같은 인간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내 안에는 백비와 비무기 같은 성정이 없는지도 물었다. 내 안에도 백비와 비무기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도하고 싶어졌다. 비무기 같은 인간이 없는 세상이 없다면, 내 안에 백비와 비무기같은 성정을 더욱 크게 만들어 달라고. 그래야 이 사회 속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아, 그러고 보면 오자서는 얼마나 충신이었던가.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도 오자서열전을 따로 써서 복수를 향해 매진하면서 오나라를 위해 충신으로 살아간 이 사나이의 특별한 인생에 기렸다.
오와월의 전쟁은 월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월도 오래 존속하지는 못하고 초나라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월전쟁은 춘추시기가 끝나고 춘추시기의 혼란보다 더 참혹한 전국 시기를 여는 첫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