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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Mar 10. 2022

6. 오와월-칼의 노래

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6. 오와월 -칼의 노래


춘추시기에 오월吳越의 청동검은 중원에서 유명했고, 칼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후세에 많이 전해진다.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어장검魚腸劍이야기라든가, 오나라의 간장干將이나 막야莫耶, 월의 주아쟈歐冶子같은  명검 장인들의 이야기라든가, 호구에 묻혀 있다는 합려의 명검을 찾아온 손권과 진시황의 이야기라든가. 장인들은 태호 주변에서 나오는 주석을 이용해서 고도로 발달된 합금 기술로 검을 만들었고, 이 명검들이 오월이 패자覇者의 지위에 오르는 데 쓰였다. 소주 위에 있는 무석無錫이라는 도시 이름은 주석과 관련있다. 

 

현대에 오왕 합려와 부차, 월왕 구천의 검은 꾸준히 대륙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는데, 검劍과 과戈, 피铍(창의 일종)를 다 합치면 수 십 자루 이상 발견되었다. 산서성, 산동성에서 발견된 것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전국시대 초나라의 영토와 그 인근에서 출토되었다. 초나라가 오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고 나서 얻은 보물 중에 제일 첫 번째는 검이었다는 이야기다. 소주시박물관에는 부차의 검 중에서 보존 상태로 보나 예술성으로 보나 가장 멋진 검이 있다. 그러나 내가 소주에 머무는 동안 새 박물관은 건설 중이어서 아쉽게도 박물관 안에 보관된 검을 가까이서 볼 기회는 없었다. 모형품일지라도 말이다.     


첫번째 두번째는 오왕 부차의 검이고, 세 번째는 월왕 구천의 검이다.


지금부터는 오나라의 역사, 혹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보자. 그런데 그 이야기는 소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대하드라마이기도 하다. 남쪽의 작은 제후국이었던 오나라는 수몽壽夢(재위기간 B.C 585~561)이 즉위한 뒤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몽은 후사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 한 채 죽어서 오나라는 심각한 후계문제에 직면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몽의 장자 직계손이 아닌 셋째 아들의 아들인 요僚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장자의 직계손이자 야심가였던 공자광公子光이 불만을 품었다. 그 즈음 오나라에 서쪽 초楚나라에서 오자서伍子胥라는 사나이가 망명을 왔다. 그가 망명 오기 전에 초나라에서 있었던 일은 이러했다. 



초나라 왕실은 진秦나라 공주를 태자 건建의 베필로 맞아들이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간사한 비무기費無忌는 진의 공주가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초평왕에게 진의 공주를 왕의 후궁으로 들이고, 정작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신부감을 물색하라고 간사한 제안을 한다. 비무기의 간사한 말이 마음에 들었던 초평왕은 며느리로 맞이할 여자를 가로채 아들까지 낳고 정작 태자는 죽이려 든다. 어쩌면 오월 전쟁과 그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춘추시대의 종말은 초나라로 왔던 진나라 공주의 문제로 서막이 열렸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원래 초 태자 건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한다. 큰스승, 태부는 초나라 대대로 명문가 출신인 오사伍奢였고, 작은 스승은 비무기였다. 그런데 오랜 시간 지내면서 비무기의 인간성을 느꼈던 태자는 작은 스승보다는 큰 스승을 더 신뢰했다. 태자는 학문이 깊고 성정이 진실한 오사를 더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자 건의 운명은 그가 사악한 인간을 싫어했기에 정쟁에 휘말려 훗날 초나라에서 도망나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에 의해 운명이 갈릴 수밖에 없는 듯하다. 비무기는 태자 건이 왕이 되면 자신은 권력 경쟁에서 밀리고 오사가 중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초평왕에게 태자 건이 모반을 계획한다고 몰고갔다.      


초나라의 충신인 오사는 초평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諫言을 할 수밖에 없었다.‘왕께서는 어찌 참소를 일삼는 하찮은 신하 때문에 골육 같은 자식을 멀리하려고 하십니까?’라고. 그러자 비무기는 평왕에게 ‘오사의 두 아들은 모두 현명하므로 없애지 않으면 초나라의 두통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그들을 불러 들여 죽이십시오.’라고 조언한다. 한마디로 비무기는 오 씨 가문을 멸족시키려 들었다.

          

오사의 아들들에게 아버지로부터 조종에 들어오라는 편지가 온다. 오사의 아들들은 그 편지가 함정임을 알았다. 사기 열전에는 오사는 큰아들은 성품이 온순해서 조종에 들어올 것이라고 짐작했다고 했고, 둘째 아들은 성격이 고집스러워서 안 올 것이라고 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큰아들은 두 사람이 다 도망을 가면 잡힐 것을 염려하여, 자신은 부친이 잡혀있는 곳으로 가고, 대신 동생, 오자서만큼은 도망갈 수 있는 시간과 명분을 벌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오사 부자는 죽임을 당한다. 진실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부자의 목숨이 날아간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 죽음이었다. 형의 눈물겨운 희생을 가슴에 묻은 오자서는 도망자 신세로 떠돌다가 천신만고 끝에 당시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던 오나라로 망명한다. 그리고 공자광公子光을 만난다. 광의 권력의지를 간파한 오자서는 그를 오나라 왕으로 옹립해 초나라에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오자서는 자신이 알아보고 키운 자객, 전제專諸를 공자광에게 소개한다. 전제는 거사를 위해 공자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어머니를 봉양해 줄 것과 월의 구야자歐冶子가 만든 어장魚腸이라는 명검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객, 전제는 연회장에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그 자신도 호위병에 의해 죽는다. 합려闔閭는 그렇게 왕위에 올랐고 오자서는 재상이 되었다.  


합려가 왕이 된 후, 그의 밑에는 오자서 외에 백비伯嚭, 손무孫武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손무는 모든 사람이 아는 손자병법의 저자이다. 그는 고향인 제나라의 내란으로 중원을 떠돌다가 오나라에 와서 손자병법을 썼다. 손무는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의 군사軍師로 활동하게 된다. 합려는 자신 휘에 모려든 인재들과 함께 오나라의 국력을 키워, 오나라를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당시 합려의 명으로 소주성을 짓는데, 오자서와 백비가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 오자서와 백비가 실무형 관료역할까지 했던 듯 보인다.    


 

오자서가 건축에 참여한 소주성 남쪽의 반문盘门 

 

기원전 506년, 오자서의 소원대로 오나라는 초나라를 쳐들어가서 수도를 함락시키고, 오나라보다 먼저 춘추패자가 된 강국 초나라를 거의 괴멸직전까지 몰고갔다. 그런데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오나라의 뒤에서 월나라가 뒤꿈치를 무는 전갈처럼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합려는 다시 오나라 진영으로 후퇴를 해야 했다.      

B.C 496년 합려는 십년 전의 원한을 갚기 위해 월나라를 침공했다가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서 죽는다.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와 월의 원한은 깊어갔다.  


1. 드리마 '와신상담' 속의 오왕 부차  2. 부차에게 패해 노비가 되어 끌려가는 월왕 구천과 왕비


BC 494년 왕위에 오른 부차는 월을 침공해서 월군을 격파했다. 월왕 구천은 회계산会稽으로 쫓겨 가서 패배를 인정했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부차는 구천을 살려두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부차가 원래 용서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야심가여서 그랬다고 본다. 부차가 노렸던 것은 오월 통합 정도가 아니라 중원을 포함한 천하통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원이라는 세계에 자신이 큰 대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구천을 살려두었다. 원수 같은 이웃 나라를 자신의 발 아래에 둔 부차는 자신감을 과시했다. 이 때부터 부차는 오자서의 고언을 멀리하고 백비의 아부에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나라의 운명이 몰락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북방의  제나라에 대한 과도한 전쟁을 삼가서 국력 낭비를 줄이자고 건의하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편 오나라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백비는 부차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적당히 하면서, 월과 내통했다.      


B.C 485년 경, 백비가 오자서를 모함했고, 부차는 칼을 보내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부차를 원망하며, 자신의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 두어 후에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오자서는 자결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사후에 월나라의 오나라 침공을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오나라는 월왕 구천의 침략을 당해 무너지고 부차는 소주 근처의 고소산姑蘇山으로 쫓겨갔다. 이후 산속에서 버티다가 B.C 473년 죽어 오자서 볼 면목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고 한다. 춘추시기 오나라는 역사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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