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뒤뜰, 소주 Suzhou
5. 아홉개의 정鼎이 사라진 시기
나는 중국에서 새로운 성省에 갈 때마다 먼저 성박물관에 가는 것을 먼저 고려했었다. 관광지 입장료가 비싼 중국에서 유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박물관 구경은 추천할 만하다. 대개의 공공박물관은 신분증을 지참하면 무료이기 때문이다. 소주는 성省의 수도가 아니기에 성박물관은 없지만 소주시박물관(蘇州博物館)이있다. 어린 시절 한때 소주 원림이 있던 집에서 살았고, 성년이 되어 유명한 건축가가 된 레오밍 페이가 설계했다. 건물도 멋있고, 눈여겨볼 만한 유물도 많다. 그리고 소주박물관의 옆은 태평천국의 충왕부忠王府 건물로 이어지고, 충왕부의 옆엔 현재 소주원림박물관이 있으며, 충왕부 뒤쪽이 졸정원拙政園이다.
내가 중국에서 박물관 방문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은 중국 국가 박물관에 가서 중국의 상고시대(夏商西周) 청동기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서였다. 상고시대 전시관엔 동물 모양을 모방하거나 추상적인 디자인의 무늬가 새겨진 향로와 솥이 여러개 있었다. 정鼎은 고대의 솥이다. 그릇 모양이 세 발이나 네발 달린, 그리고 손잡이가 달린 솥 모양을 의미한다. 호화스런 정을 일반 백성이 생활에 사용했을 리는 없고,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썼다. 특히 상고시대 국가인 주나라의 국가 권력을 상징했다. 나는 상고시대의 청동기들을 보자마자 매료되었다.
함께 같던 지인이 말에 따르면, 중국이 넓다 보니 각 지역에서 출토된 가치가 높은 문화재는 각 성급 박물관에 있었다고 한다. 수도, 북경이라고 딱히 중국의 보물을 모두 모아 놓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 개방에서 성공을 거두자, 중국문화를 해외에 홍보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각 성의 박물관에 있던 대표 유물을 모아서 성대하게 재개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나라 박물관에서 우리 유물을 볼 때도 조선 시대 보다 백제나 고구려 신라 혹은 그 이전 상고시대 유물에서 더 깊은 감흥을 느꼈었다. 그것은 중국 박물관에서도 똑같았다. 명청 시대 유물도 많았지만 나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중원일대에서 발견된 청동기 외에도 또 나의 눈길을 끈 것이 있다면 삼성퇴 유적지, 그러니까 고대 촉 땅에서 발견된 전대 미문의 마스크와 사천 일대에서 발견된 부조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노나라 혹은 제나라 지역이었던 산동에서 발견된 토용이었다.
춘추시대, 제후로 추정되는 권세가의 무덤 부장품, 토용이다. 춘추시대이니 진시황이 진나라를 세우기 훨씬 전이다. 진시황의 병마용 전사들이 대략 키 180 정도의 실물 병사를 그대로 재현했다면, 산동의 토용들은 높이 40cm 정도이다. 진시황의 무덤 부장풍속은 어느 날 갑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 시대의 풍속을 답습한 것이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니까.
“주나라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망하면서 정鼎은 윤몰淪沒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다.”
<사마천 사기 봉선서封禪書 중>
주나라는 9개의 제후국에 정鼎을 하사했다. 그런데 그 정이 매몰됐다, 사라졌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한 시대의 권력이 사라지고 다른 시대가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는 춘추시대였다. 그럼 춘추시대는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가? 중국 상고시대 주나라가 부족국가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동쪽으로, 즉 서안 부근에서 낙양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770년이다. 주평왕이 동천하여 동주東周를 시작하게 되는데, 당시에 이미 중국 각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제후국이 이미 칠 백 여개가 있었다. 소국이 난립하다 보니, 작은 나라들은 강한 나라에 병합당하며 숫자를 줄여가고, 서서히 지역 패권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춘추시기라고 하고 기원전 476년 전국시대가 열리기 전까지이다. 춘추전국 시대가 갖는 시대적 의의는 상고시대에 중국 대륙 각 곳에 흩어져 있던 부족민들이 서로 대립을 하면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틀을 처음 만들어갔다. 남쪽 장강 하류지역에 있던 오와 월도 춘추시대 후반기에 들어서 중원을 노리는 패자의 자리에 올라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춘추 이전의 상고시대는 사라진 구정과 함께 전설이 되었다.
중국국가 박물관에 갔던 해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을 때였다. 그해 가을 나는 심양에서 적봉赤峰을 거쳐서 좀더 몽골 고원에 가까운 임동마을(林东镇 또는 巴林左旗)에 갔었다. 임동현은 초원을 뛰어다니는 말과 소를 볼 수 있는 몽골 초원이다. 그리고 초기 거란족의 발상지로 요나라 초기 상경上京유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임동현에 도착을 하니 가란족의 영웅, 야율아보기의 늠름한 동상이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숙소를 정하자 마자 택시를 불러서 요나라 왕실의 사원(召庙)을 찾아갔다. 사원이 자리잡은 산은 고원에 있는 산이라서 그런지 크지는 않지만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산 입구에서 나는 거대하고 괴상한 조형물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그곳은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족의 부족연맹체가 나라를 처음 세우고 도읍을 정한 땅이었다. 그런데 저 땅에 왜 저런 정鼎 모양의 향로 조형물이 있는 것일까?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대략 이삼층 빌딩만했다. 그 정鼎은 아무리 봐도 그 땅에서 살아온 몽고족이나 거란족의 문화와는 상관없는 상징물이었다. 보자마자 한족의 문화횡포라고 생각했었다. 중국어도 못 했지만, 이제는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현지인들에게 저 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유목민족의 영험한 기상이 서린 땅에 그 정기를 가로막기 위해 한족이 세운 상징조형물 같아서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