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9 수
나의 이름은 에반.
고아원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졌다.
12살에 고아원이 망한 뒤에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왔고, 내가 이곳에서 살기 위해 배울 수 있었던 건 소매치기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골목 한 귀퉁이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왜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내 마지막 이야기를 지금 더듬어 보려 한다.
3일 전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런던의 기차역에서 소매치기를 위한 타깃을 찾고 있었다.
매일이 지옥이었다. 그날 하루 무언가 훔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그로 인한 배고픔에 잠도 잘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수습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웠지만, 나에게는 전쟁과 별개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타깃을 찾던 중,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 중년 남성의 가방을 훔치기 위해 조용히 다가갔다. 중년 남성이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그 순간, 나는 가방을 낚아채고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이곳의 지리는 이미 머릿속에 모두 들어있었기 때문에 물건만 손에 들어온다면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가방 주인을 따돌리고 조용한 곳에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새것의 빵 하나와 우유, 작은 카디건 하나와 돌돌 말린 종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프던 나는 빵과 우유를 순식간에 먹어치웠고, 작은 카디건을 대충 찢어 목에 두른 후 종이를 펼쳐보았다.
알 수 없는 설계도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나는 어차피 돈이 안될 것이라 생각해 종이를 다시 가방에 넣어둔 뒤, 그 자리에 둔 채로 돌아갔다.
허름한 아지트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꿀처럼 단 잠에 들었고, 그렇게 다음날까지 숙면을 취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주변이 시끄러웠다.
주섬주섬 기워진 옷들을 껴입고 밖으로 나가보니 집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내가 있는 이 동네는 전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였는데, 그만큼 먹지 못해 죽는 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서로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있는 자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싸움이 일어나긴 해도, 우리의 울타리 안에서는 서로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일은 적었다. 그런 동네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또 생긴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보았고, 그곳에서 내가 본 광경에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 나보다 더 어린아이의 시신이었다. 얼굴만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 된 아이. 옷은 전부 찢어져있었고, 온몸이 다 파란 멍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시신의 상태 때문은 아니었다. 그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어제 내가 훔쳤던 가방이 놓여있었다. 아마도 이 소년은 내가 버리고 간 그 가방을 우연히 주워온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시신으로 다가가 어제 대충 찢어 목에 두르고 있던 카디건으로 얼굴을 덮어주었고, 자연스럽게 가방 안 또한 확인하였다. 가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아아, 아마도 이 소년은 그 돌돌 말린 종이 때문에 이런 비극을 겪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이 어린 소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해 버리려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나의 목덜미를 잡아 내동댕이 쳐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랐고, 내동댕이 쳐진 나 또한 아픈 것보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추스르고 앞을 올려다보니, 어제 기차역에서 봤던 그 중년 남성과 처음 보는 덩치가 큰 남자 3명이 서있었다. 그 중년 남성의 얼굴을 본 순간, 내 몸은 순간 경직되었고 그 잠깐 사이에 내 얼굴과 배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중년 남성과 함께 있던 남자 3명이 나를 무차별적으로 때리기 시작하였고 중년 남성의 말이 있기 전까지 그 폭력은 계속되었다.
'어제 기차역에서 내 가방을 훔친 놈이 네놈이구나.
니 놈이 저 애새끼 얼굴에 카디건을 덮어주는 걸 보고 알았다. 너 때문에 죄 없는 저 애새끼만 쓸데없이 죽어나갔어.'
설마 그들이 아이를 죽이고 나서도 남아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내 무덤을 파고 말았구나.
나는 중년 남성의 한마디를 끝으로, 동행한 자들에게 끌려갔다. 끌려가는 도중 중년 남성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런던에 왔고, 무엇을 준비 중인지 욕을 섞어가며 나에게 이야기했고, 내가 가방을 훔쳐가면서 자신의 플랜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계속해서 화를 내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찾아온 이 경제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해서 런던에 공장을 차리기 위해 올라왔다 이거야. 근데 네놈의 그 이기적인 도둑질에 내 금쪽같은 시간낭비는 물론, 기계에 대한 설계와 설비 미팅까지 어그러졌어. 이 버러지 같은 놈! 내가 그 장인들을 설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아?!
에라, 빌어먹을! 너 같은 거지새끼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먹을 리가 없지. 니 놈은 곱게 죽지는 못할 줄 알아!'
이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내뱉는 한 글자 글자마다 나는 정말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내 머리에 쇠말뚝이 박히는 것처럼 박혀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그들의 사무실처럼 생긴 건물로 끌려가 밤새도록 그 중년 남성의 부하들의 감시를 받으며, 맞고 기절하고, 맞고 기절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아침 해가 밝아오기 전, 고요하기 그지없는 새벽에 내 오른 다리를 부러트리고, 어느 골목 귀퉁이에 나를 버리고는 사라졌다.
이제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으로 돌아왔다.
내가 왜 이 골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지.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 성한 곳이 하나 없고, 끼니 또한 먹지 못해 힘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부러트려서 걸을 수 조차 없다.
내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렇게 외로운 것인가.
삶에 미련은 없다. 아쉬움도 없다.
그저 배고픔이 싫어서 도둑질을 했고, 배고픔을 채우면 그만이었기에.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죽음이 나를 구해준다면, 오히려 반가운 것 아닌가.
나의 삶은 이렇게 끝나도 전혀 아쉽지 않다.
그런데 왜 자꾸 나 때문에 죽어버린 그 아이의 얼굴이 생각이 나는 것인가. 내가 그 가방을 훔치지 않았다면, 내가 그 가방을 거기에 두고 오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지금도 살아있을 텐데... 자신의 시간과 돈을 낭비시켰다고 그 아이를 죽인 그 놈들보다, 소매치기로 인해 이 상황을 만든 나에 대한 자책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제 손도 발도 감각이 없다.
혹시라도 내가 죽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그곳에서 꼭 사죄하리라.
나의 이 초라한 죽음으로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하길 바라는 말도 안 되는 이기적인 생각과 함께 나는 이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