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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호 Jan 27. 2023

새롭게 태어난 슈퍼 J인간

달팽글방(2023.01.27. 변화)

  엄마는 가끔 아주 중대하고 큰 재앙이라도 닥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남편에게,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네도 알겠지만 얘가 짐이 보통 많아야지. 알지? 전에 집에서 살 때 방이 어땠는지…” 말끝을 흐릴 때마다 엄마의 예쁜 눈썹 사이에는 선명한 세로선이 그어졌다. 속으로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결코 입밖으로는 내지 못한다. 나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방을 청소를 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었고, 이런 마음은 몇 년에 한 번 들까 말까 하는 것이어서 나는 지체 없이 방을 청소했다. 그리고 그날 밤 동생이 내 방문을 열더니 허망한 표정으로 “누나 귀신이네.”했다. 사연인즉슨 인터넷에 누나방, 여동생방, 오빠방 등 다양한 엉망인 방들이 등장했고 자신이 보기엔 누나 방이 월등히(!) 잡다하고 지저분했기에 사진을 찍어 그 위상을 증명하려 했다고. 그런데 그날 천지신명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받은 내가 망신당할 위기에서 쏙 벗어난 거다.


  여하튼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내 정리정돈과 청결의식에 대해 지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의자에 옷이라도 걸어놓으면 좋겠건만 나는 벗어서 바닥에 놓기 일쑤였고 그나마도 닥치는 대로 밟아댔기 때문에 늘 구겨진 교복차림이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고양이 털범벅까지 더해졌는데 아침마다 엄마는 한 손에는 돌돌이를, 한 손에는 김에 싼 밥을 가지고 쫓아와서는 입에 밥을 넣어주고 몸뚱이에 도배지 바르듯 사정없이 돌돌이를 문질러댔다. 그러면 나는 우물 우물대며 “아 됐다고! 괜찮다고!!! 나는 내가 안 보이니까 괜찮다니까!!”라고 소리치며 후다닥 학교로 달려갔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아침이면 청소기를 돌리고, 매일 밀대로 고양이 털을 쓸어낸다. 소파는 다회용 털제거기를 사용해 먼지와 털, 고양이 모래와 발톱을 먼저 털어낸다. 그리고 돌돌이로 한 번 더 밀어 최대한 털을 없애다. 이불은 이 주에 한 번씩 세탁하고, 매일 쫙쫙 편 후 기다란 나무 구둣주걱으로 팡팡 두드려 먼지를 뺀다. 로봇청소기는 외출할 때, 낮잠 잘 때마다 돌린다. 짝꿍이 매일 아침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하면 나는 배변 봉투를 비우고 3주가 되기 전에 고양이 화장실 모래를 전체갈이한다. 고양이 전용 수세미와 고무장갑을 이용해 화장실을 씻고 닦아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새 모래를 부어둔다. 돌돌이가 떨어지지는 않았나 자주 찬장을 확인하고, 고양이 모래가 떨어지지 않게 주문하도록 짝꿍을 닦달한다. 가끔씩 온 집안을 스팀청소기를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뿐 아니라 각종 설거지는 바로바로, 아기 기저귀 쓰레기통도 차기가 무섭게 비워대고 빨래도 열탕소독도 부지런히 한다. 물론 귀찮을 때도 많지만 작심삼일을 122번 하면 1년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의지를 자주 다잡는다.


사랑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이건 정말 모두 사랑의 힘이다. 집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짝꿍, 고양이 털이 간지러울 신생아, 그리고 두 고양이의 쾌적한  환경과 지구를 위해 게으름뱅이는 움직인다. 비록 내 옷은 구겨지고 더러워질지언정 땀을 뻘뻘 흘리며 락스로 화장실을 청소한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 없는 것은 당근으로 처리한다. 일회용품도 야무지게 모아 가끔씩 나눔으로 당근에 올리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간다. 아름다운 잡동사니들에 대한 포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매일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생활을 영위한다. (아기의 토와 침으로 옷은 반드시 매일 갈아입는다. 땡큐 베이비) 이 집안 생명체들의 위생과 건강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은 지독한 ENFP를 슈퍼 J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슈퍼 J인간은 생각한다. 나 한 십오 년 뒤에는 김에 밥 싸들고 애기 쫓아다니는 거 아냐? 하고. 엄마, 미안해! 그땐 엄마가 이런 마음인 줄 몰랐지.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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