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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habgirl Mar 31. 2024

어쩌다 거머쥔, 이별을 준비할 의무

발달장애인 사별교육을 준비하는 마음-2

아빠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유일한 물건 

내겐 엄마가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되던 해부터였을 거다. 

아빠와 남동생과 셋만 남는 삶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소 가정적이던 아빠는 나와 동생의 끼니를 챙기느라 늘 먹을 것을 양손 가득 사들고 퇴근하셨고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 덩어리씩 포장해 냉동고에 얼려놓곤 하셨다. 

그렇게 우리 세 가족이 어찌어찌 근근이 생활한 지 어언 3년 차 나는 고3, 동생은 중3이 되었다. 

아빠는 매일 아침 나와 동생의 아침밥을 식탁 한가득 차려주었고, 바쁜 와중에도 당시 국민차였던 낡은 쥐색 엑셀에 나를 태워 학교 앞 큰 도로까지 태워 등교시켜 주셨다. 

무척이나 덥던 여름날-

엄마의 부재로 가세가 기울었던 우리 집은 반지하집에 살고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이면 정말 통풍이 안돼서 죽을 맛이었다. 

7월 말 즈음이었을까.. 

하교 후 아빠에게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 입원을 하셨단다. 

두세 달을 어깨가 아프다 하시더니, 병원에 갔더니 늑막염이라며 입원을 권유했고 급히 입원했으니 며칠만 동생과 잘 지내란 말을 남기셨다. 

그 뒤로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의 병명은 폐암이었다. 그것도 말기.. 

아빠가 폐암이고 길어야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일면식도 없는 간호사를 통해 들어야만 했다.

회사 근처 작은 병원에 있던 아빠가 갑자기 서울대병원으로 옮긴다기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8월 말경. 고3 2학기를 개학하고 그 첫 주 토요일. 아빠의 병문안을 가서 간이침대에서 낮잠이 들어버렸다. 

아빠에게 주사를 놔주러 온 간호사가 어렴풋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난 아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는  뻔한 말 말곤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능을 보기 일주일 전 11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 야자를 하고 있는데 삐삐가 엄청나게 계속 와댔다. 느낌이 싸했다.. 

당시 우리 집은 큰아버지댁과 가까이 살고 있었고, 아빠의 병간호는 큰아버지댁에서 모두 부담해 주셨다. 

삐삐에 남은 번호는 큰집 번호였다. 

교실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빨리 나올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그 자리에서 혼절을 해버렸다. 

아빠는 마지막 임종을 편히 준비하기 위해 용인에 위치한 호스피스에 계셨고, 정말 마지막 준비를 하고 계셨다. 불과 일주일 전에 아빠를 보고 왔고, 간신히 걸어 나와 차를 타고 가는 나와 동생을 보며 손도 흔들어주셨는데  그게 내가 아빠를 제대로 본 마지막 날일 줄은 몰랐다. 아니 솔직히 30% 정도는 미리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난 아빠와 이별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3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더욱 내게 아빠의 시한부를 말하기 어려웠겠지만, 고3이 아닐지라도 미성년자인 자녀에게 하나뿐인 부모가 3개월 밖에 살 수 없단 얘기를 그 누가 꺼내기 쉬우랴. 

당시의 아빠보다 나이가 더 든 지금의 나도 같은 상황을 겪는다면 쉽게 말 못 할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의도적으로 쥐어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난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할 의무를 손에 지웠다. 

좀 엉뚱한 사람으로부터, 엉뚱한 방식으로 쥐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빠의 시한부 판정을 듣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1997년 9월, 10월의 기억은 통째로 사라진 듯하다. 


아빠를 잃고 일주일 뒤 큰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수능을 치른 나는 전공을 '사회복지'로 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더 정확한 시점으로는 아빠가 호스피스에 계시던 당시 도와주시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 사회복지를 전공해야겠다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당초 아빠의 일이 있기 전까지 내 희망전공은 '국어국문' 아니면 '유아교육'이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계기로 방향이 확 틀어져버렸고 어쩌다 보니 그 일을 23년째 하고 있다. 


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성인발달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일을 한다. 

나와 비슷하게 나이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그들도 언젠가 부모를 잃을 텐데 나같이 아픈 과정을 겪을 테지? 

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곤 한다. 

제발 그들만큼은 나처럼 갑작스럽게 부모와의 이별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꼭 그들이 발달장애인이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내가 아는 누구라도 이별해야 한다면 준비된 이별을 하기를 원한다. 


발달장애인들에게 부모와 언젠가 헤어져야 함을. 그 시간을 미리 준비해야 함을 알리고 천천히 한 발자국 씩 나아가며 준비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을 준비하는 첫걸음으로 이 공간에 내 아픔을 조심스레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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