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시절, 방학이 시작되고 삼총사가 모이자 이별을 통보했다.
"전학 가?"
탄식이 이어지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창피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낯선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한 달을 보내야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수영장에 같이 갈 약속도 그새 잊은 채, 서울 토박이인 근배와 민주는 오히려 호들갑을 떨며 시골이 있는 날 부러워하거나 함께 가보고 싶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초등학교 졸업까지 방학식만 끝나면, 엄마는 어김없이 전남 광양인 외갓집으로 나를 보냈다. 차라리 방학도 없고, 시골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써 본 적도 있지만,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맞벌이를 했던 엄마의 설득에 단념하곤 했었다.
외갓집으로 가는 여정은 불면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서울 역에서 간이역인 옥곡 역까지의 기차 운행이 드물어 자정이 가까운 밤기차만 탔는데 7시간 남짓한 도착시간까지 단 한 번도 잠든 적이 없었다.
1980년대 당시, 통일호 열차 안 풍경은 술을 먹거나 노름도 하고 간혹 고성방가로 승객끼리 티격태격 말다툼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코 고는 소리와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뒤섞여 좌우간에 유난히 시끌벅적했었다. 게다가 객실 사이 통로를 전세 낸 험상궂게 생긴 흡연자들로 인해 화장실 갈 엄두도 못 냈고 만원 승객들과 식음료 카트를 거칠게 끌고 다니는 홍익회 아저씨가 객실 문을 열면 고약한 담배냄새가 내부를 칭칭 휘감기도 했다. 제일 마주하기 힘든 건 가끔 낯선 승객들이 사투리가 섞인 위협적인 말투로 ‘아따 꼬마야 니 으디 사능교?’라고 물을 때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했던 걸까?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지 말라는 가르침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두렵지만 어색하게 ‘집은 서울이고 외갓집에 가는 데요’라고 애써 대답하면 ‘외갓집이 어딘디?’ ‘옥곡이요.’ ‘옥곡? 그긴 어딘디?‘라고 또 묻는데 우물쭈물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보 아니냐고 낄낄거리던 사내의 얼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굴욕적인 사건 이후로 ‘앞으로는 기차 안에서는 잠자는 척해야지’라고 굳게 다짐한 적도 있었다.
5학년 여름방학에는 나 홀로 옥곡 역에서 어둑 캄캄한 시골길을 30분 이상 걸어서 도착한 적도 있다. 한 살 터울인 사촌 형이 자전거를 끌고 옥곡 역전까지 마중 나왔지만, 그 날만은 늦잠 자느라 오지 못했고, 늘 잠이 덜 깬 피곤한 얼굴을 보면 괜히 짜증도 나고 미안하기도 했다.
매일 밤, 친구가 그리웠고 엄마랑 얄미운 여동생까지 보고 싶었다. 외손자에게 각별히 애정을 주는 할머니가 계셨지만 늘 고된 농사 일로 바빴다. 서울에서는 흔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친손자들 몰래 귀한 군것질거리를 사주시고 밥 먹을 때도 대놓고 맛있는 반찬을 챙겨주셨다. 나로 인해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꼈는지 그들은 원망과 질투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집 안에서 서서히 고립되어 갔다.
시골마을 아이들은 서울촌놈이라고 놀려 댔으며 혼미한 기억이지만 마을 아이가 밀어서 논두렁 우물에 빠져 죽을 번한 일도 있었다. 심지어 재첩을 캐던 시골 소녀의 죽음도 우연히 목격했고 한 번은 겨울철 농로 얼음판에서 썰매 송곳에 발을 찔린 사촌 형의 상처에 할머니가 된장을 지져 온 동네에 비명이 울려 퍼진 적도 있었다.
외갓집에서 보낸 방학생활은 즐거움보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섭고 두려웠다. 어서 빨리 개학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 모든 건 달라졌다. 과거의 오해가 이해가 되고 악몽조차 아련한 단꿈처럼 무뎌져... 쓸쓸해지는 감정의 파편...들이 나에게 엄습해왔다... 돌이켜보면, 상처는 시간이 해결하는 게 아니라 기억의 재편집일지도 모르겠다. 외가에 나를 맡겨 둔 건 아빠와 엄마의 금슬이 좋은 이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시간은 이미 추억으로 변해 버렸다. 첫 방학부터 할머니는 외손자의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시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연중무휴 개인사업을 하는 근배와 독일에서 요리를 하는 민주를 데리고 삼총사의 첫 휴가를 떠나고 싶다. 이민만 안 갔어도 충분히 가능했을 요량인데 현실성이 무척이나 떨어진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시 혼자 떠난다. 엄마는 훌쩍 커버린 내가 외갓집을 간다고 말하자, 잠시 갸우뚱하더니 뿌듯한 마음으로 배웅해 주었다.
일상에 찌든 삶이기에 좌석에 앉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승객들에게 매너를 지키기 위해 코골이 방지 밴드는 필수 아이템이다. 기차가 꿈결처럼 도착하자, 시골 옛 풍경이 다가와 어안이 벙벙하다. 헤드폰을 벗으니 자연의 풍부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른 아침,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우리 손자 왔네’ 하며 엉덩이를 쳐주며 반겨준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은 나의 할머니다.
할머니의 게장, 재첩 초무침, 시래기 된장국까지 남도 음식 솜씨에 감탄하며 양조장에서 받아 온 시골 막걸리 한 잔에 고된 현실을 잠깐 잊어 볼 테다. 할머니의 고된 농사일도 덜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자칫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외갓집 식구들은 어른스러운 내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게 분명하다.
시골에서 놀림을 받던 서울 촌놈은 재첩을 캐다 물에 빠진 소녀를 기적적으로 구한 용감한 시민이 되어 표창도 받게 된다. 텃새에 얼어붙은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려, 혹시나 귀촌을 꿈꿀지도 모르겠다. 매일 밤, 할머니 곁에서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눈을 한번 껌벅거릴 때마다 낯익은 시골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사라진 통일호 야간 행을 타고 할머니가 사는 그 집에 가고 싶다.
이젠 다시 오지 않을, 소년의 방학생활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