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금욕을 실천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유혹을 견디기 어렵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은둔입니다." – 안상헌 [미치게 친절한 철학] 중에서 105p-
'은둔형 외톨이'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 단어를 듣고 긍정적인 느낌을 받을 사람은 드물다. 왜 그럴까? 이 단어는 사회부적응자 혹은 아웃사이더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의도된 사회적 프레임이기도 하다.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는 인간은 사람들과 어울려 교류하고 소통하며 사는 모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은둔하는 칩거하는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울 수밖에 없다. 각종 언론과 뉴스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들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계속 부각하며 아주 큰 사회 문제로 인식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은둔하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며 부정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으려 사회라는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이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유해진 국가들이 모두 겪는 현상이다. 일본은 사토리 세대가 그랬고 중국의 탕핑 세대가 그렇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쓰는 단어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일본은 그들을 득도(깨달은) 세대라고 표현했고 중국은 평평하게 드러누운 세대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런 자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은둔은 인간이 스스로 바로 서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 중 하나임을 알게 되면 그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게 된다.
금욕과 은둔의 효과
세상과 차단하고 금욕과 은둔으로 내 안에서 스스로 기쁨과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바로 설 수가 없다. 세상은 바로 우리가 바로 설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완벽한 환경을 조성하고 혼자 있지 못하게 하려 노력한다. 그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해야만 돈이 돌고 조직이 생기고 서열이 생기며 부와 권력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에 길들여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럼 홀로 스스로 온전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깨달았다. 그 분주함과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인 사람은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깨인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성과 교양을 가지게 되었음이고 그런 지성과 교양인은 이제 무력이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럼 그들에게 맞는 사회적 시스템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아타락시아 (Ataraxia)
“내게 떡 하나와 물 한잔을 주면 제우스 신과 행복을 다투리라.”
– 에피쿠로스 <쾌락> 중에서 -
에피쿠로스학파는 고대 쾌락주의 철학파로 알려져 있다. 이성으로 대변되는 스토아학파와 대립 구도를 이루는 학파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이란 우리가 '쾌락'하면 떠올리는 그런 류의 쾌락이 아니다. 쾌락(快樂)하면 우리는 유흥이나 자극적인 오락을 떠올리지만 쾌락은 우리말로 유쾌하고 즐겁다는 의미이다. 흥분되고 중독되는 그런 쾌락이 아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앞에 ‘소극적인’이라는 관형사를 붙여야 한다. 작은 것에서 쾌락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세상과 단절된 자연 속 그들만의 공동체 속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유혹을 차단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추구했다. 애초에 타인과 주변의 환경에 의해 자신이 휘둘리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은둔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과거 쾌락주의 학파라는 이름 때문에 이성주의 스토아학파 보다 괄시를 받는 학파처럼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동양으로 치면 에피쿠로스는 노장(老莊 : 노자와 장자) 사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스토아는 유가(儒家 : 공자, 맹자) 사상에 가깝다. 노자는 자연주의 공자는 공리주의다. 국가와 사회는 후자의 사상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은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일과 관계를 줄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을 강제로 일과 관계 속으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물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그들은 청빈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과 관계를 줄인다는 것은 결국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에서 멀어짐을 의미하고 그건 결국 금전적인 소득과 이익에서 멀어짐을 의미한다. 그들의 선택은 결국 에피쿠로스적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소확행
요즘은 독서 인구가 부쩍 늘어난 듯하다. 평일 낮에도 도서관에 자리를 찾기 힘들다. 카페에서도 커피 한 잔과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커피 한 잔 값에 2~3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여가 활동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는 소비 쿠폰을 주고 공휴일까지 늘려가며 국민들의 소비를 촉진하려 한다. 그런데 놀 시간을 줘도 소비를 촉진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물론 커피 판매량과 도서 구매량이 늘어날 순 있겠다. 하지만 과거 놀고먹고 마시는 여가 비용이 더 크다. 이러면 곤란하다. 나라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 다행히 한국은 수출 비중이 커서 내수 소비의 영향력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지만 그래도 무시할 순 없다. 교양인이 늘어날수록 상품이나 서비스 소비가 줄어든다. 쇼핑과 같은 물질적 소비가 주는 쾌락이 오래가지 않고 영속적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고 능동적인 쾌락을 찾는 것이 교양인의 첫걸음이다. 물질과 서비스로 인해 얻어지는 쾌락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다. 물질을 가지고 서비스를 받으며 느끼는 쾌락이다. 그들은 그것들에 의존해서 행복해지기에 더 벌고 더 쓰는 방식으로 행복감을 유지 증폭시킨다. 그들 덕분에 과거 한국의 소비와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기업이 성장했고 나라가 부유해졌다.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제품(중간재)과 상품 수출을 이끈 해외 소비자와 (최종) 생산자들의 역할이 더 컸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들의 소비를 위해 주야장천 일만 했다. 당시엔 저축이 미덕인 시대였다.
한류 (K-Wave)
한국의 제품과 상품과 음식을 좋아하는 세계인이 많아졌다. 한국은 이제 이민 오고 싶은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이민자 증가율이 세계 2위이다. (1위 영국, 3위 호주) 아마 한류의 열풍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인구 유입은 선진국에서 오는 유입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유입은 동남아시아의 개도국의 이주 노동자가 가장 많다. 이제 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니다. 다민족 이민 국가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에는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한국말을 한국스럽게 하고 있다. 한국인은 더 이상 황인종이 아니다.
이민 국가로의 전환
나는 호주에서 적잖은 시간 살다 와서 이민자의 삶과 그 환경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있다. 이민국가는 보통 새롭게 유입되는 이민자들이 그 나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으킨다. 건설, 제조, 3D 업종에서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력이다. 사회의 기저를 떠받드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국인 은둔자들이 많아질수록 그런 산업계의 인력은 줄어든다. 그걸 보충할 수 있는 대체 인력은 이민자들 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이민자 인구수는 27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5%가 넘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 전망된다.
그들은 기존 한국 남녀 조합의 가정보다 더 많은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고 있다. 기존 한국 청년 세대는 인구 감소의 원인이지만 이민자는 한국 인구의 증가의 원인이다. 보통 한국 남성과 이민자(해외) 여성의 조합이 많은 편이다. 이건 한국 여성의 결혼과 출산 기피현상과 연관이 깊다. 물론 남성들도 거기에 편승하고 있어 접점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개중에 적지 않은 한국 남성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려는 수컷의 본능을 포기하지 않으려 차선책으로 국내가 아닌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국제결혼이 증가하고 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서는 매주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데 해외 이민자들의 아이들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이민자들이 많아서 교회에서는그들을 위한 국가별 언어별 예배를 따로 할 정도이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민 생활에서 신앙은 힘이 되기도 한다. 나 또한 호주에서 그런 경험을 했기에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이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지만 이 선택은 남녀 둘의 선택이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하다. 양자 합의가 있어야 한다. 지적 소양이 넘치고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운 한국의 남녀들은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결혼과 출산이 그 불안과 걱정의 중심에 있다. 왜 그런지는 너무 복합적이라 생략하겠다.
하지만 해외에서 홀홀 단신으로 날아온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이민자가 오히려 결혼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아이러니이다. 이건 결국 결혼과 출산이 물질적 경제적 요인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 심리적 그리고 문화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가진 게 많고 누리는 게 많을수록 불안과 걱정은 많아진다.
생산과 소비 주체의 전환
한국은 이제 이민자들에 의존해서 경제와 사회를 돌려야만 하는 경제 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미국과 호주 캐나다의 이민자 정책과 시스템을 배우고 도입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한국인은 은둔과 금욕의 소확행 그리고 비혼과 비출산으로 개인의 안전한 행복 추구에 힘쓴다. 그 경제 전선과 생산소비의 공백은 코리안 드림의 욕망으로 가득 찬 이민자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호주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드림을 꿈꾸면서 정말 열심히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몸은 고되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처럼 근심과 걱정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 땀 흘리고 분주하게 살면 그런 것들이 스며들 틈이 없다. 숙면과 건강이 자연스레 찾아들더라.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이다. 호주에는 그렇게 땀 흘리고 일하는 이민자들이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 대한 대우와 처우가 나쁘지 않다. 지금은 그런 성공한 이민자 1세대들이 가진 부가 호주 경제에서 아주 큰 비중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백인들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며 불안과 우려를 들어내고 있다.
산업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효율과 실적에 의해 성장하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과 속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교양인은 그것의 부당함을 알기에 견디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민자는 참고 견딘다. 왜냐? 그래야 그 나라에서 발 붙이고 살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국가의 브랜드 파워로 그들의 욕망을 열정적인 노동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미국이 그렇게 성장한 나라 아니던가? 미국의 영광은 모두 이민자의 피와 땀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한국의 차례가 왔다. 미국처럼 강대국으로 나아가려면 한국도 그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방식은 한국만의 특색을 지니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양 있는 한국인과 열정적인 이민자의 조합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회 질서와 발전은 교양과 욕망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은둔자는 교양인이 되어 사회를 이롭게 만들고 이민자는 노동자가 되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선 순환은 일어날 수 있을까? 과거의 미국과 호주처럼…
Make Korea grea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