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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질문 사이

[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두 번째 -

by 글짓는 목수

"하이데거는 불안을 '근본기분'이라고 말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 안상헌 [미치게 친절한 철학] 중에서 302p -


불안이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심리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소멸로 향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무의식보다는 의식적인 삶을 선호한다.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불안이 스며들지 않는다. 의식적인 상태는 보통 두 가지 상태를 가지는데 그건 고통과 권태이다. 그 경중에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분주함이나 무료함이라는 다소 가벼운 어휘를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불안도 고통도 권태도 모두 싫다. 그것들을 잊기 위해 쾌락을 좇는다. 문제는 그 쾌락이 궁극적인 쾌락이 아닌 대상과 수단을 통해서 얻는 일시적이고 중독적인 것이라는 게 문제다. 우리는 불안을 고통과 권태와 같은 취급을 한 결과이다. 하지만 사실 불안이 밀려올 때는 고통과 권태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고통은 대상이 있고 권태는 수단을 찾는다. 대상을 회피하고 수단으로 잊는다. 불안은 뚜렷한 대상이 없다. 출처를 모르니 제거할 수도 없다. 이것도 무의식의 영역과 흡사하다.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이 궁극적인 목적이듯 불안은 인간의 근본기분인 것이다.

독서토론 [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in 88 커피




'불안'이라는 단어는 내 삶에서 가장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의 글을 오랜 시간 읽어온 독자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나의 인생 책이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이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나는 이 책을 한 페이지씩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꽤나 많아졌다. 그건 내가 실명과 필명의 통합하고 오프라인의 독서모임에서 그걸 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인과 철학자만이 세계를 본모습 그대로 바라볼 줄 안다. 오직 그들만이 환상 없이 살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똑똑하게 본다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르난두 페소아가 불안을 파고든 시인이라면 하이데거는 불안을 파헤친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시를 짓는 것이 예술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 생각했다.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결국 인간은 추상적인 예술을 언어라는 인간만이 가진 도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장황한 언어가 아닌 함축적이고 상징적이며 은유적인 시를 통해서 그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한 궁극적인 것(죽음과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말이 많고 글이 길면 구차해진다. 의도를 품게 된다. 의식적인 것이다. 말과 글은 인간을 선동하고 조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는 선동하고 조종하지 않는다. 느슨하고 자유롭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 1976) &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나는 나에게 질문하고 나를 부정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하이데거 또한 죽음과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 경의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봤다. 존재자(나)가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 시작은 불안과 죽음을 마주하며 현재의 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질문을 ‘경건한 사유’라고 지칭했다. 경의로움은 경건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경건함은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질 때 얻어지는 것이다.


‘왜 남녀와 좌우와 남북은 갈등하고 분열하는 것인가요?’


나는 매주 예배당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나의 기도는 항상 질문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기에 아무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존재에게 묻는 것이다. 문답식의 대화법이 가장 이상적임을 알고 있다. 고대의 모든 철학자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지혜를 얻었다. 나는 고대의 철학자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신을 만들어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스스로 찾는다. 다만 내가 찾는 것이 아닌 신이 나를 통해 찾는 것이라 믿는다. 이건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의도치 않은 우연이 벌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의도하고 계획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다 이뤄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질문 (Question,?)


학교나 회사나 교회는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생과 상사와 목사는 항상 가르치려고만 들뿐이다. 잠자코 들어줄 학생과 부하와 성도들을 원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건 그들이 별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배운 데로 가르치는 것이다. 답습이다. 그렇게 답습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고 바쁘기 때문이다. 빨리 진도를 나가야 하고 빨리 실적을 올려야 하고 빨리 다음 예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신에게 물어보고 고전 속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글귀에서 찾는다.


그 질문에 대한 나만의 답을 이 온라인 공간에 쏟아내고 또 질문을 던진다. 답을 하든지 말든지 내가 알바 아니다. 누군가는 궁금해서 댓글을 달고 질문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 글쟁이에게 물어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전문가들과 작가들과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그저 훔쳐보거나 지켜보며 신기해 할 수도 있다. 그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는 질문의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일 뿐이다. 그 답은 모두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댓글로 물어봐야 답해 줄 수 없다.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요즘 같이 답을 찾기 쉬운 시절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그저 호기심이 많아 질문이 더 많은 것 뿐이다.

영화 [28년 후]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불안은 당신에게 계속 죽음을 떠올리라는 신호이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생명 연장을 위해 의학기술과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며 죽음을 극복하려 한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게 가능해진다면 여태껏 내가 써온 모든 글들은 무의미해진다. 육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근본기분인 불안을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인간은 이유를 모른 채 세계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 안상헌 [미치게 친절한 철학] 중에서 313p -


하이데거는 끊임없이 인간의 실존을 탐구한 철학자였다. 그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했다. 그리고 존재자인 인간은 그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계속 불안을 마주해야 하고 그것에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페소아가 불안을 마주하며 계속 산문시를 썼던 것처럼. 둘은 근본기분(불안)과 경건한 사유(질문) 사이를 오고 가며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을 혼란스럽게 해석하는 일로 낭비하지 않았던 삶의 시간을. 나는 산문을 쓰면서 탕진했다. 그런 산문 덕분에 나는 미지의 우주를 내 것으로 만든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in M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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