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에 관한 상념
"우리 모두는 작가다. 우리가 무언가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쓴다. 본다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포괄할 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쓴다는 것은 나에 대한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내고 남기는 행위이다. 우리는 작가가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진 존재라 생각하지만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 모두가 가져야 할 기질에 가깝다. 보는 것(눈으로 & 상상으로)을 쓴다는 것은 편집하고 정리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복합적인 기억들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쓰는 것은 삶이 던져준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줄거리 찾고 감정을 불어넣고 스토리를 남기는 것이다. 그래야 기억된다. 그 기억이 나의 존재를 대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으면 나는 영원해진다. 그렇게 죽은 자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스토리로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전승되는 것이다. 고전이다.
죽어도 계속 사는 것은 몸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이 우리의 머릿속에 살아서 계속 그를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입가에 미소 짓는 것은 그 자가 내 앞에 없어도 그가 남긴 기억 때문 아니던가... 그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면 써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데 아름다운 것들이 많죠”
최진영 작가는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많다고 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138억 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우주의 비밀과 이치를 고작 30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인류가 모두 알아낸다는 것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증명하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살아서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남들보다는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더 많은 이해는 더 많은 사람의 이해를 받는 곳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신비로운 것들을 이해하고 논리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피곤하지만 인간이 피곤하지 않다면 이와 같은 인류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와~ 이것 봐! 아름답지 않니?.”
“우웩! 그게 뭐가 아름답다는 거냐?”
비 온 뒤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가 맑게 개인 햇살아래 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개미들에게 뒤덮여 온몸을 물어 뜯기고 있다. 지렁이는 스스로 땅 속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개미들의 도움으로 산산이 분해되어 땅 속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에게 어떤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보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나답다'는 순우리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개미와 지렁이는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인간만이 아름답지 않은 것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수긍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해와 느낌이 충돌했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해야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이걸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움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흔하고 의미 없이 쓰여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이로움을 선택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의 원래 모습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너무도 좁은 시야로만 보게 되었다. 무언가 보고 입으로 말을 내뱉는 표현은 너무 쉽고 간편하다. ‘아름답다’는 말은 생각하지 않고 나온 것이다. 이해하지 않고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지금 내가 글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면 그 아름다움이 이해와 생각을 통해 재조명된다. 이 과정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이 원래(물자체)를 그대로 볼 수 없는 프레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현생 인류가 살아온 30만 년 동안 겹겹이 쌓여온 프레임들에 의해 그 어떤 존재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탓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하고 봐야지만 그 원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수많은 순간들은 그 어떤 의미도 기억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건 아름다움이 품고 있는 경이로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슬픔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그럼 아름다운 느낌이 생각을 불러낸다. 말은 느낌의 즉흥적인 반응이고 글은 느낌이 생각으로 전환되어 눈앞에 출력되는 과정이다. 느낌은 불쏘시개와 같다. 느낌이 없다면 좀처럼 생각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불이 붙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느낌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 느낌 중에 어떤 것을 골라내어 생각하고 그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럽다. 그건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수집되는 정보(데이터)는 너무 많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어지러운 정보를 편집하고 다듬어야 한다. 글은 스토리를 만들어 우리가 기억하기 좋은 형태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게 진정한 아름다움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내가 남과 달리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남들보다 돈이 많아서도 남들보다 지식이 많아서도 남들보다 명함이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름다움 보다는 위대로움을 원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름다움으로 위대로워지기도 한다. 그런 자들은 보통 죽고 나서 그렇게 된다. 지렁이가 분해되어 수많은 개미들의 에너지가 되고 땅 속 곳곳에서 다른 존재들의 생명력을 불어넣듯이… 하지만 인간은 살아서 위대해지고 싶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말과 글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위대해지려는 욕망이 강할 것이다. 그 느낌을 당장 느끼고 싶다. 작가는 글을 쓰는 자이지만 작가가 쓰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지기보다 위대해지려 함이리라. 입을 닫고 글만 쓰던 내가 요즘 말이 많아지고 있다. 그건 아마도 나 또한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이 커져가고 있음이리라. 그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내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이 그 욕망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삶을 남들보다 더 잘 살아내려면 더 많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비교와 우월에 유혹이다.
그래서 모두가 발언권을 가지려 연설과 강연을 한다. 쓰는 시간을 줄이고 말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위대해지려고 한다. 말이 힘이다. 정치인이 말이 많은 이유이다. 말하는 자는 사유하는 시간이 줄고 반응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고 처신보다 처세에 능해지는 것이다. 처세술을 가르치는 책들이 넘쳐난다. 삶이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글은 은둔하는 자가 친해지는 것이고 말은 처세하는 자가 친해지는 것이다.
작가
작가(作家)란, 자신의 집을 짓는 의미를 품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이 땅에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과거 호주에서 적잖은 시간 목수로 일하면서 만약 내가 호주에 살게 된다면 언젠가는 내 손으로 내 집을 짓겠다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톱과 망치로 그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지금은 글로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목수는 너무 많은 것(공구)을 들고 다녀야 한다. 무겁다. 작가는 펜 하나와 종이(노트북)만 있으면 된다. 가볍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모두가 똑같은 집을 원하는 모양이다. 닭장처럼 쌓아 올린 도심 속 아파트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와 같다. 각자 크기와 위치만 다를 뿐이다. 똑같지만 더 넓고 경치와 교통이 좋은 곳을 원할 뿐이다. 누군가는 평생 자신의 집을 가지지도 못하고 살고 누군가는 넓고 호화로운 집을 여러 개 가진다. 모두가 자신의 집을 짓지 않고 지어진 집을 예쁘게 꾸미고 포장할 뿐이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현대 도시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다'는 말을 너무도 쉽고 간편하다. 감흥이 없다. 그 누구도 아름답게 살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입에 담고 산다. 그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알아도 그것을 포기하고 위대함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 속에 아름다움은 반드시 짓밟히기 때문이다.
나는 위대로움과 아름다움 사이의 망설임으로 살고 싶다. 짓밟히고 싶지도 않고 짓밟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난 위대로울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