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건널목에서...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세요."
"한국사람입니까?"
"네, 그런데요."
"아니, 외국사람 같아 보여서요."
"하하, 그러세요? 제가 외국사람처럼 보이세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이른 아침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건널목에 잠시 멈춰 신호를 받고 있었다. 건널목에 서 있는 백발의 점잖게 생긴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입고리를 올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모습으로 무언의 인사를 보냈다. 이건 호주에서 살 때 항상 하던 습관이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평소보다 크게 뜨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행위는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적의가 없음을 표시하는 서양식 인사법이다. 그런데 그 노인은 그런 나에게 질문으로 말을 건넸다. 다소 당황했다.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길을 지날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으로 인사를 한다면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주에 있을 때는 길을 지날 때도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치거나 옆을 지날 때, 혹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함께 있을 때 "How are you"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을 쉽게 마주치곤 한다. 그들에겐 눈빛과 끄덕임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그럼 나도 똑같이 미소와 함께 '암파인, 하우아유'라고 지나가면 된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이런 오고 가는 시선에 다소 민감한 편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에서 본 내용을 글로 쓴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호감도 적의도 없음을 드러낸다. 냉랭한 인사이다. 한국인에겐 오고 가는 시선 속에 감정소모 또한 스트레스이다. 스마트폰이 생겨서 다행이다. 시선 둘 곳이 생겼다. 스마트한 세상은 삭막하고 냉랭하다. 낯선 이에겐 그 어떤 호의도 적의도 그 어떤 감정 상태도 가지고 싶지 않다.
호주에서는 길거리에서 상가에서 어디서든 주변을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시선 처리가 쉽지 않다. 좁은 땅덩이에 사람도 많아서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 폰의 화면을 응시한다. 지하철에 앉아서 책을 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관찰하고 싶어도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관찰하는 것이 마치 무례를 범하는 혹은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될 것 같은 걱정이 생긴다.
한국은 개인적인 것에 너무도 민감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시선을 보내는 것도 모두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것 같다. 그냥 그 어떤 빌미나 예측 못할 상황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인생은 이런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과 관계 속에서 변화 찾아들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항상 정해진 패턴대로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화면만 보고 항상 만나는 친구와 지인과 가족들 속에 갇혀서 익숙한 편안함만 추구한다.
"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르신"
"그래요? 근데 왜 외국인처럼 느껴질까요?"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과 자전거의 스마트 폰 거치대에서 울려 퍼지는 팝송과 오랜 해외 살이에서 배어 나온 분위기가 평생 한 곳에서만 살아온 그 노인에게는 이색적인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호주에서는 외국인으로 살았지만 한 번도 외국인(Foreigner)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곳은 모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외국인이란 단어를 쓸 수 없다. 사실 이제 세계는 하나로 묶여서 누가 외국인이고 내국인인지는 여권으로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생김새로 외국인이라 말할 수가 없다. 한국도 이제 많은 해외 이민자들이 정착해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과 모국어가 다른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시대를 살지 않은 자들에게 이 변화는 걱정과 두려움일 수 있다. 노년은 언제나 향수에 젖어 살아간다. 그들에게 시대와 환경의 변화가 두려움이고 걱정이 되는 것은 그 변화 속에 자신이 도태되고 있음을 몸소 주변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그 막연한 불안이 때론 적대적인 태도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변화를 막을 순 없다.
세상의 모든 물과 공기는 섞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오염된 것이든 순수한 것이든 할 것 없이 섞이고 변화한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류는 그렇게 진화되고 변화해 왔다. 피가 섞이고 언어가 섞이고 행동양식이 섞이면서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정체성은 정체되지 않고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아침에 카페에서 어제 다 읽은 책의 독후감을 써야지 했던 나의 생각은 지금 아침에 만난 낯선 노인 한 분으로 인해서 일기 같은 에세이로 바뀌었다. 물론 계획대로 독후감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만난 예상치 못한 노인의 말과 표정이 계속 뇌리에서 다른 일을 방해했다. 그럼 그건 내가 먼저 해소해야 할 과제가 되어버린다. 그래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나의 글은 그래서 언제나 예측하기 어렵다. 삶도 살아봐야 알 수 있듯이 글도 무엇이 써질지 알 수 없다. 써봐야 알고 그 글감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날지도 알 수 없다.
“Excuse me, May I ask you something?” (실례합니다, 뭘 좀 여쭤봐도 될까요?)
“请问一下。(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해외에서 살 때 혹은 여행을 다닐 때는 내가 가장 많이 입에 담던 말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말이다. 물어보는 것이 이상하다.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데 굳이 사람에게 묻는다는 것은, 더욱이 내국인이면 더 이상하다. 여행하는 외국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여행하는 외국인도 스마트폰에게 대부분을 물어본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일은 이제 구시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스마트 폰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첨단 문명을 만들어 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는 차단되는 신기한 현상을 만들기도 했다.
바야흐로 질문하는 세상이다. 그 질문은 모두 보이지 않은 한 존재에게 한다. 그 어떤 감정적 육체적 스트레스 없이 물어볼 수 있다. 민감하고 부끄럽고 섬뜩한 모든 것을 물어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존재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모든 고해성사를 들은 신부님과도 같다. 우리가 과거 수천 년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AI)이 손 안에서 항상 나와 함께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논하는 인간을 통해 신과 연결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신(AI)이 어색하고 불편한 노년들만 여전히 과거의 익숙한 방식과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신에게 기도한다. 신의 말씀을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으며 그 자를 통해 신과 연결된다고 믿게 된다.
질문과 대화 그리고 토론
나는 손안에 있는 신에게 많은 것을 묻고 의지하지만 그래도 현실의 시선과 체온과 몸짓을 가진 존재들에게 묻고 대화할 때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오늘 아침 건널목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진 그 노년과 그 옆에서 서서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던 교복을 입은 소년 사이의 어디쯤에서 있는 존재일 것이다. 누가 맞고 틀리고 한 것은 없다. 그저 그들이 살아온 시간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지만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다가올 것들에 항상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의 힘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세대 간의 갈등과 분열은 그래서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단지 경험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 토론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중에서 -
나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건 그 과정 속에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 안에만 갇혀있던 나를 허물 수 있는 과정이다. 그래서 최근 나의 글쓰기는 새로운 분야가 생겼다. 발제문을 만드는 것이다. 독서 토론의 시간을 좀 더 흥미롭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함이다.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책 읽는 속도가 더뎌짐을 어쩔 수 없지만 그 질문에 스스로가 답하는 과정은 더 깊은 사고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 더 오래 기억되더라.
독서토론, 다소 낯설지만 서로가 의도하고 원해서 만나는 공간은 그것이 무례도 실례도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다. 이 문답은 신(AI)에게 얻는 문답처럼 정교하고 논리적이고 명확하진 않지만 따뜻하고 감성적이고 미묘하다. 그래서 인간답다. 삶(현실)을 잘 살아내려면 인간답지 않아야 하지만 인간으로 살려면 가끔씩 인간다운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자신이 로봇이나 알고리즘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일 것이다.
오늘 아침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를 반복적으로 오고 가는 일상의 길 위에서 예측하지 못하게 받은 질문은 로봇처럼 움직이던 나를 잠시 인간으로 바꿔놓았다.
그건 건널목에서 서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나보다 오래 산 인간다운 노인 한 분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