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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즐거움 사이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by 글짓는 목수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빠르게'가 되었다. 그 결과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중에서 -


쾌락과 즐거움을 구분할 줄 알며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모습일까? 쾌락(快樂), 빠를 쾌(快)에 즐길 락(樂)이다. 빠른 즐거움이다. 문제는 이 빠름이다. 빠르다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장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유혹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쟁터이고 이 전쟁은 속도전이다. 빠르지 않으면 도태되고 짓밟힌다. B2 폭격기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빠르게 날아가 초토화시켜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나에게 빠르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부추기며 끊임없이 경쟁과 비교 속으로 내몰아간다. 그것에 대한 보상 또한 빠른 쾌락이다. 빠르게 쾌락을 얻고 다시 또 빠른 경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복한다. 술과 마약 그리고 섹스는 인류 발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수단과 도구가 되어버린 것은 이것이 주는 빠른 쾌락이 또다시 분주한 속도전을 버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히 즐거울 수 없는 것은 이 도구 없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쾌락에 익숙해지면 즐거움은 어색해진다.



Hermann Hesse (1877~1962)

헤르만 헤세, 언제부터인가 또 다른 시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시인은 페르난두 페소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읽게 된 서양고전들 중에 유독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와 글들이 자주 나의 머릿속에 상기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쓰는 글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속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던 헤르만 헤세, 그는 시 보다 소설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는 스스로 시인이라 칭한다. 다행히 살아서 빛을 본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와는 대조적이다. 살아서 이름을 알린 시인과 죽어서 이름을 알린 시인의 대표적인 예시가 아닐까. 누가 봐도 그 명성과 인지도 그리고 업적은 헤르만 헤세가 압도적으로 크다. 더욱이 독일의 세계적 영향력은 변방의 유럽 포르투갈보다 크다. 또한 헤세는 페소아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고 그만큼 더 많은 작품과 행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헤세가 페소아 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Fernando Pessoa (1888~1935)

문학과 예술은 비교해 우월을 따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그것만의 독창적인 문체와 개성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둘 다 각자의 개성을 남겼다. 그래서 둘은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구전되고 업로드되고 공유되느냐에 따라서 그 질량(크기)이 달라진다. 질량이 커지면 중력(영향력)이 더 강해지기 때문에 이건 그 작가의 원래 역량과 업적과 상관없이 불어나기도 한다. 중력은 계속 더 많은 것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붓다 혹은 예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중력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둘로 갈라진 것일까?


헤세는 그렇게 둘로 갈라진 세상을 통합하려고 홀로 고뇌한 시인이다. 부질없고 무모한 짓이지만 그런 짓들이 그의 작품들을 만들어내었다. 시인은 초야에 묻혀서 세상을 논하지만 세상에 관여하진 않는다. 시인은 아주 간접적이고 정치인은 아주 직접적이다. 하지만 간접적인 인간이 더 오래도록 기억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것이 문학이 지닌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서 기억되고 정치인은 살아서 기억된다. 우리가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는 살아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정치한다. 국제정치, 국내정치, 사내정치, 부부정치, 연애정치 등등.


“삶이 힘겨울 때에는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 (중략…)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만이 진정한 우리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즐거움] 중에서 –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나누고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파티를 즐긴다. 그 속에 많은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냥 명함을 주고 나를 소개하며 악수하고 잔을 부딪치며 양쪽 입고리를 올린다. 입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렇게 웃는다.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웃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능력을 교양과 예의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건 가식에 가깝다. 어른들은 가식 없이는 함께 할 수 없기에 교양이라는 가식을 통해 어울려 살아간다.


“야~ 빨리!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어서 스크루를 박아!”

“헉! 못 주머니에 스크루가 다 떨어졌어요!”

“뭐? 안돼! 나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잠시만, 앗! 여기 있다.”


두 남자가 사다리 위에서 천장을 덮을 넓고 긴 보드를 들고 있다. 한 남자가 두 손으로 받치고 한 남자가 전동 드라이버로 스크루를 박으려고 했다. 그런데 못 주머니에 스크루를 다 사용했다는 사실 그때 발견했다. 낭패다. 그때 다행히 호주머니에 넣은 손에서 스크루 두 개가 손끝에 느껴졌다. 살았다. 나는 두 개의 스크루로 그가 떠받치고 있는 보드를 천장의 프레임에 고정했다. 두 개의 작은 스크루가 두 사람을 살렸다. 그때의 환희는 잊히질 않는다.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땀과 3m가 넘는 사다리 위해서 느낀 그 기다란 보드의 무게감과 아래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겨우 2cm의 작은 두 개의 스크루의 발견으로 순간 안도와 환희의 감정으로 바꿔놓았다.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면 즐거웠던 날보다 불행했던 날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더 자주 상기되며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지배는 삶을 더욱 침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불행했던 날들을 풀어서 놓아주어야 한다. 작가는 글로서 그것을 풀어놓는 사람들이다. 소설가는 생생하게 상상하며 쏟아내고 시인은 몽롱하게 상상하며 내어놓는다. 함께 죽을 뻔했던 경험을 함께 한 사람은 동지가 된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자는 그 우정이 죽는 날까지 간다. 그때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쾌락은 돈으로 살 수 있어도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중에서 -


고통 속에서 얻는 즐거움이 아닌 물질과 대상을 통해서 얻는 쾌락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산에 오르는 이유는 육체의 고통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목수로 일을 할 때는 그런 순간들을 일터에서 종종 경험했지만 지금의 일상은 그것을 경험할 수없기 때문이다. 물론 위험은 크게 없다. 여기에 위험까지 더해지면 그 뒤에 찾아드는 기쁨은 안도감이 더해져 배가된다.

[안갯속에서] 금오산 약사암에서... 250920

사랑이 쾌락 속에서 꽃 피울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쾌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사회가 사랑을 변질시키고 영원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건 고대의 많은 성인들이 이미 예견했고 근대의 마르크스가 논리적으로 글로 계산했으며 그 이후에 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반복해서 이것을 소설과 논문 속에서 말하고 있다. 사랑은 비물질이지만 물질(대상)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해야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이것을 받아들인 자들은 겸허해지고 활력 없는 생기를 가지게 된다.


“고통은 네가 막아 내려고만 하기 때문에 아픔을 주고 네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만 하기 때문에 너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변명하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라.”

-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중에서 –


그래서 그들은 자연과 고통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 대상과 느낌을 바꿔 버린다. 현대인들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자세이다. 그래서 어디서도 권장하지 않는다. 이걸 권장하면 짓밟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고 놓아둘 수 없다. 욕망이 없는 인간 세상은 허무해진다. 활력이 없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침체된 경기와 마이너스 성장하는 경제이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다른 나라와 민족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할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과거의 역사를 통해 경험했다. 그 역사를 몸소 체험한 지금의 노년은 그것은 악이라 생각한다. 선과 악은 모두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악은 구분은 불분명한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이유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 중에 이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익은 선이고 손해는 악이다.


내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멍청하고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비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중용과 중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야 하는 것임을 안다면 이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완전한 평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소처럼 이리저리 기울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중간으로 돌아오려는 성질이다. 우리는 이런 자를 색깔 없는 얄밉고 미덥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자신의 편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과 목표인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기는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자들이다. 하지만 중용과 중도는 깨우친 자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서 분노하기보다 오히려 슬퍼하는 것이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하인(집사)이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 옆을 지키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주인을 절대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주인은 시기심과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을 외면할 수 있지만 운명은 그렇지 못하다”

-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중에서 -


많은 사람들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외면할지 알 수 없다. 그 외면은 분명 분노와 질투 그리고 시기심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삶을 견디는 가장 큰 기쁨(즐거움)이 아닐까?


내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 프리드리히 니체 -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in 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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