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과 두려움 사이

김애란 작가의 인간 문학이란...

by 글짓는 목수

"망설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매 순간 망설임을 느끼고 있다. 그 망설임은 아주 잠시 일수도 있고 아주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망설임은 이성적인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감정적인 고민 때문일 수도 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의 망설임은 AI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감정적인 망설임은 물어봐도 답을 줄 수 없다. 그건 답이 없기 때문이다.

망설임은 설레임과 두려움 사이에서 오는 감정이다. 문학은 이런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쓰는 글이다. 때문에 문인은 망설임에 익숙해진다. 망설임이 길어지면 기다림이 된다. 망설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작가는 설레임(기대)과 두려움(불안) 사이에서 망설이며 기다리는 삶을 산다. 그 흔적이 글이다.



손석희의 [질문들] 중에서

“인간한텐 있고 AI에겐 없는 한 가지가 있었어요.”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김애란 소설가의 답변이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망설임', 작가의 AI 활용에 관한 질문에 그녀가 던진 답변이었다. 망설임은 비효율적이다. 아무런 결과물 없이 흘러가는 시간, 보이지 않는 감정만 계속 물결친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망설임이 글이 되어 하얀 바탕 위에 새겨진다. 그때 새겨지는 글은 오랜 망설임의 결과물이다. 그 망설임이 글이 될 때는 작가는 글과 함께 느낀다. 웃고 울고 고통스럽고 힘들다.


인간의 문학은 작가가 그 과정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망설임이 글이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작가가 느끼면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건 작가가 망설임을 글로 (독자에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것을 감당하고 책임지려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독자에게 얻을 공감과 이해에 대한 설레임과 또 다른 독자와 비평가들로 받을 비난과 오해에 대한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망설임이 아닌 버퍼링


AI는 망설임이 없이 거침없이 써내려 간다. 버퍼링은 있을지언정 망설임은 없다. 물론 AI는 수 천년 간 수많은 작가들이 망설임을 거쳐서 내놓은 작품(글)들을 조합한다. 사용자의 프롬프트에 따라서 최적의 조합과 상황과 문체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 이때의 작가는 기획자가 되고 편집자가 된다. 작가는 감정 소모 없이 글을 쓸 수 있다. 작가도 일종의 감정 노동자이지만 AI는 우리를 감정 노동에서 해방시켜 준다. 회사와 조직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느끼는 감정 없이 그 많은 일들을 일사 분란하게 병렬 처리해 준다.


과거 내가 회사에서 이 부서 저 부서 돌아다니며 업무협조와 회의와 자료 조사 과정에서 생기는 관계적 시간적 마찰을 없애 버렸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혁신이다. 그 눈부신 혁신은 감정 소모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대세가 될 작가이다. 이야기를 기획하고 질문하는 능력과 편집하는 능력 갖춘 작가. 대중과 독자를 효율적으로 설득하고 감동시키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생산성 높은 창작자이다. 자본과 상업을 끌어들이는 이 시대를 선도할 창작자이다.


그런데 글을 쓸수록 감정이 메말라 간다. 역설적이지만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 과정에서 인간성의 말살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건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다. AI는 가장 인간적인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가장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렇게 작품은 상품이 되어버린다. 산업 자본주의 세상에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지만 상품만을 쫓는 풍토는 결국 작품이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유행과 그 시대의 관심사와 주류 소비자만 타켓팅한 상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것들은 망설임 없이 소재와 인물과 플롯만 바꿔서 계속 재생산된다. 마치 나의 관심사만 계속 보여주는 유튜브 알고리즘과 같아질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은 망설임을 잡아먹는다.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계속 보고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Writing & Excercising in Blaxland Riverside Park NSW 200403

과거 코로나19 시기 때 호주의 락다운으로 어느 허름한 골방에 갇혀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글을 쓰며 울고 웃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썼던 나의 소설은 지금 보면 너무 유치하고 어설픈 곳 투성이지만 그때 썼던 글은 내가 과거 오랜 세월 속에서 느꼈던 수많은 설레임과 두려움 사이의 망설임을 글로 토해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나에겐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상품이 되기 힘들지만. ㅋㅋ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모든 작가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작가가 글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계기가 되고 망설임과 친숙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김애란 작가가 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감정을 묵혀두고 어떻게 익어가는지 지켜보는 과정, 그 과정은 글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과정인 것이다.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는 글은 나올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감정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감정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섣불리 현재의 사건과 상황에 대한 감정을 현재에 서술하지 않는다. 그건 기자나 언론이 하는 일이다.

주저하는 연인들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과거 즐겨 듣던 노래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빼놓지 않고 부르는 나의 18번 중 하나이다. 남녀 간에 생겨나는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언제나 문학의 주요한 소재이다. 망설임으로 주저하는 시간은 감정이 파도치는 시간을 버티고 견디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시간만큼 상대를 기억하게 된다. 인간은 본디 그런 동물이다.


뇌과학적으로도 변연계(편도체)를 많이 자극한 기억 속 대상을 오래 기억하게 되고 되뇌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즉 감정을 자극하는 기억이 해마에 저장된다. 작가는 이런 장기 기억을 오래도록 붙들고 쓴다. 이 기억은 변형되고 허구가 뒤섞이고 새로운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결합되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시작이 감정의 망설임에서 비롯되었다.


쓸모없는 인간 – 유일한 인간?


과거 이런 망설임과 우유부단한 성격은 가장 쓸모없는 인간상이었다. 선택과 집중, 신속한 선택, 감정의 정리, 논리적 판단으로 대상을 정하고 집중해서 가시적인, 정량적인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역량이 산업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인간상은 유효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이 효율성의 속도는 AI 따라갈 자가 없다. 그럼 우리는 AI를 가장 많이 동시 다발적으로 잘 활용하는 멀티 태스킹에 능한 인간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될지도, 과거 주판에서 계산기 그리고 엑셀 시트로 도구가 발전하면서 효율과 편의가 올라갔지만 인간은 더 바빠졌고 더 여유가 없어졌다.


속도는 항상 더 빠른 가속도를 요구한다. 인간의 욕망과 같다. 빠름은 망설임과 주저함이 숨 쉴 수 없는 곳이다. 언제나 기술의 발전은 효율과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 인간을 원하지만 이런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도구가 탄생하면 대체되어 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왜 망설임과 주저함의 가치를 되돌아봐야 하는지 알게 된다.

Writing in Strathfield Council Library NSW 221126

설레임과 두려움 사이에서


내가 이토록 비효율적으로 매일 천천히 사색하고 천천히 글을 읽고 천천히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만 샘솟는 새로운 상념과 놀라운 상상에 대한 설레임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설레임이 글이 되어 세상에 드러날 때 감당해야 할 시선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이건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도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만든 망설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이 추억이 된 것이다.

작가는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창작일 순 있지만 문학일 수 있을까? 이제 (인간의) 문학은 망설임의 과정이라고 정의해야 하는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Writing with hesitating in the morning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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