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나무 줄기에서 발견한 세 가지 생(生)
꿀벌은 근면하고 정확한 노동자와 같다.
말벌은 포악하고 파괴적인 정복자와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벌이 있다.
쌍살벌이다.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선택은 대개 양극단 중 하나를 강요받곤 한다.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달콤한 꿀을 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강력한 포식자가 되어 시스템의 정점에 올라설 것인가. 그러나 여기,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채 '종이'로 집을 짓고 '나무'의 틈새를 거처로 삼은 쌍살벌의 생태는 나에게 제3의 길, 즉 '경계의 삶'에 대해 알려준다.
벚꽃 엔딩이다. 봄이 지나간다. 산길에 선 벚나무에서 꽃잎이 날리고 푸른 잎이 나기 시작했다. 벚나무가 줄지어 선 등산로에서 발견한 한 벚나무의 갈라진 틈, 못 보던 낯선 곤충들이 모여 있다. 그 비좁고 어두운 줄기의 심연 속에서 새어 나오는 수액에 취해 파티를 하고 있는 존재는 벌들이었다. 한참 동안 벚나무 앞에 서서 녀석들을 관찰했다. 생김새가 특이했다. 나의 호기심은 언제나 질문이 된다.
쌍살벌(바다리, Paper wasp)이었다.
꿀벌의 부지런한 날갯짓과 말벌의 서슬 퍼런 위압감 그 어딘가에 위태롭게 발을 걸치고 있는 이 기묘한 생명체들을 응시하며, 녀석들의 생태가 나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꿀벌의 세계에서 벗어나 말벌을 꿈꾸었지만 이제는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나는 '글을 짓고 나무를 만졌던' 한 존재로서 벌들의 세상에서 인간 세상의 세 가지 풍경을 떠올렸다.
꿀벌(Honey bee)의 초상 : 노동자
우리는 오랫동안 꿀벌의 삶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수만 마리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육각형의 완벽한 질서를 구축하는 그들의 군집은 현대 문명의 거대 조직과 닮아 있다.
꿀벌로 대변되는 인간상은 '조직의 일꾼'이다. 이들은 거대한 시스템의 보호 아래 안온한 일상을 보장받는 대신,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반납한다. 이들이 생산하는 '꿀'은 아주 달콤하지만, 그것은 결코 생산자 개인의 것이 되지 못한다. 거대한 창고에 쌓여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소비될 뿐이다. 자신의 종족의 번영을 위한 충성과 헌신이 생(生)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우리는 모두 벌집의 육각형 구멍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나 자신이 아닌 '우리'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위해 밀랍(蜜蠟)을 짜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꿀벌의 삶은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개인'의 균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육각형의 각도는 오차 없이 정교해야 하며, 모든 개체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춤을 추어야 한다. 이 시스템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수십년을 하루 12시간씩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어떤 이의 지난날처럼, 꿀벌의 삶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지만 그 이면에는 소멸해 가는 자아의 서글픈 날갯짓이 서려 있다.
말벌(Hornets)의 초상 : 정복자와 지배자
꿀벌의 반대편에는 말벌이 있다. 그들은 압도적인 체구와 치명적인 독침으로 무장한 채 생태계의 공포로 군림한다. 말벌로 대변되는 인간상은 '권력지향적 포식자'일 것이다.
이들의 삶은 '지배'와 '확장'으로 요약된다. 말벌은 꿀벌처럼 남을 위해 꿀을 모으지 않는다. 대신 다른 생명의 노동을 찬탈하고,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들이 짓는 집은 같은 쌍살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견고하다. 겹겹이 쌓아 올린 외벽은 외부의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러나 그 견고한 요새는 동시에 지독한 고립의 상징이기도 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끝에 남는 것은, 누구도 믿지 못하고 오로지 힘의 우위만을 확인해야 하는 황폐한 내면이다. 말벌의 집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폐쇄적이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왕의 독재가 얼마나 서슬 퍼런지는 두꺼운 종이 외벽 뒤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투명성이 거세된, 오로지 결과와 힘으로만 증명되는 비정한 성공의 서사다.
쌍살벌의 초상 : 경계에 선 장인
그렇다면 벚나무 틈새의 이 쌍살벌들은 어떤가. 그들은 꿀벌처럼 거대하지도, 말벌처럼 파괴적이지도 않다. 나는 이들을 '독립적 창작자이자 장인'의 모습으로 읽어낸다.
쌍살벌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집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말벌처럼 집 전체를 감싸는 외벽을 만들지 않는다. 육각형 방의 입구가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는 목수의 시선으로 볼 때 매우 위태롭고도 정직한 건축이다. 자신의 밑천을, 자신이 키우는 새끼들의 모습을, 자신이 쌓아 올린 노동의 층위를 숨기지 않는다.
이 '취약한 개방성'이야말로 쌍살벌적 인간상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보호(꿀벌의 벌집)를 거부하고, 타인을 억압하는 권력(말벌의 요새)에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벚나무의 갈라진 틈이라는 '경계'에 몸을 숨긴 채, 스스로 구한 목재 펄프로 자신만의 소박한 안락한 우주를 지어 올린다.
"집을 감싸는 벽이 없다는 것은, 비바람에 노출된다는 뜻임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빛을 온몸으로 받아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쌍살벌은 꿀벌처럼 꽃을 찾아 수액을 먹으며 사색하지만, 유충을 키우기 위해 사냥을 하는 치열한 야성도 잃지 않는다. 즉, 감성과 이성, 수동적 사유와 능동적 실천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벚나무의 상처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존재의 균열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틈새를 문장과 가구로 메워가는 작가와 목수의 숙명과도 닮아있다.
벚나무의 틈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서사
내가 본 벚나무 속 쌍살벌들은 아마도 작년의 추위를 견뎌낸 여왕벌들일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좁은 구멍에 모여 있는가? 그곳이 바로 '삶의 온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생존의 에너지가 되고, 나무의 갈라진 살점은 새로운 집을 지을 재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꿀벌의 길과 말벌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시스템의 안락함에 젖어 나를 잃어갈 때의 자괴감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타인을 짓밟아야 할 때의 비정함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쌍살벌의 지혜가 아닐까.
벽이 없는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줄 아는 용기다. 똑같이 한치에 오차 없이 똑같이 지어 올린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꿀벌 노동자들과 높은 곳에 성벽이 쳐진 스카이(Sky) 캐슬에서 살아가는 상류층의 궁전과 다른 개성이 있다.
거대 조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기술(목공과 글쓰기)로 생존을 꾸려간다는 것은, 고독하지만 숭고한 자유다. 쌍살벌은 꿀벌보다 적게 소유하고 말벌보다 약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만의 결'대로 살아간다.
벚나무의 틈새는 결코 좁지 않다. 그 안에는 한 생명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설계한 우주가 들어차 있다. 목수가 나무를 만지고 작가가 문장을 다듬는 그 순간, 나는 꿀벌의 근면과 말벌의 기개를 지나 쌍살벌의 정직하고 개성 있는 건축에 도달한다.
꿀벌과 말벌 사이 - 경계에서 선 자
인간 세상의 3종류의 인간상 중 무엇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꿀벌이 없다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고,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와 국제 사회에서 말벌의 강력한 힘이 필요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라는 존재의 고유성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쌍살벌은 가장 매혹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시스템의 익명성으로 숨지도 말고, 권력의 요새 뒤로 도망치지도 말 것. 대신 자신의 노동(육각형 방)을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내고, 나무의 상처(틈새)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종이(글)'로 된 집을 지을 것.
벚나무 틈 속에서 봄볕을 기다리는 쌍살벌의 날개 위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고독 속 깊은 사유와 한강의 상처 입은 슬픈 감각이 겹쳐진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라는 명제 아래, 오늘도 나는 꿀벌과 말벌 사이 그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틈새를 메우며 나만의 집을 짓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세상을 향해 띄우는 가장 정직한 응답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