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그런 잔인성, 곧 복수에 대한 불합리한 욕구는 그녀 자신의 슬픔의 이면이었을 뿐, 시몽은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86p -
때론 상대에 대한 복수심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이 남녀 간의 감정(사랑 or 치정)에 엮인 복수심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건 복수심이라기보다 질투심이 만들어낸 비극일 것이다. 아이와 같은 순수한 감정은 어른스러운 성숙함에 의해 잔인하게 부서지게 된다. 그리고 그 순수한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의 성숙은 잔인함의 또 다른 말일지도. 그건 현실의 삶에서 취해야 할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독서 모임 때문에 집어 든 책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가벼운 듯한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감성에 젖어 읽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이성의 뇌가 작동한다. 그 이성의 뇌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작가가 생각했을 법한 제목에 관한 추론을 해본다.
브람스의 부모가 연상연하 커플(17살 차이)이었다는 사실과 그도 14살 연상의 여인(클라라 슈만, 유부녀)을 사랑했다는 사실. 사강은 아마도 소설 속 폴(39)과 시몽(25)의 나이를 브람스의 연애사를 상상하며 설정했었던 모양이다. 작가는 언제나 이야기를 완성하고 제목을 정할 때 그런 상징적인 것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 속 두 남자는 그렇게 두 명의 대조적인 음악가로 비유된다.
“이미 외우고 있는 바그너의 서곡이 있는 음반의 이면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브람스의 콘체르토가 있었다. 로제는 바그너를 좋아했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60p –
로제(40대 중반)는 바그너를 시몽(25)은 브람스를 상징한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바그너와 브람스의 나이 차이와 거의 같다. 시몽이 브람스의 음악회에 폴을 초대한 것도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 작가의 의도가 스며든 상징일 것이다. 바그너는 당대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망 있는 음악가였다. 명성이 자자했으며 사회적 지위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음악가였다. 반면 브람스는 완전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음악가이다. 미술로 치자면 피카소와 고흐로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밥만 먹고살 수가 없다. 가끔씩 라면이나 피자 같은 인스턴트 음식 혹은 자극적인 음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무엇이 주식이고 특식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안정적으로 매일 먹는 것이 비슷하다고 봤을 때 주식은 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밥만 먹어야 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매일 라면과 피자를 먹는 삶은 사실 더욱 끔찍할 수 있다.
남녀 관계 또한 이와 비슷한 것일까? 최근 들어 서양 여성 작가의 고전을 연달아 읽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여성의 머릿 속도 남성 못지않게 저속하고 이기적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의 내면은 남녀를 불분하고 윤리적 관념과 개인적인 욕망이 부딪치고 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의 감정은 누가 뭐라 해도 정직하고 순수하다. 이건 육체와 영혼의 소리에 충실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물정에 익숙해지고 때가 묻은 성숙한 어른의 사랑은 육체와 영혼의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현실의 가면무도회에서 상대를 찾는다. 거기서 가면을 쓰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만났다. 하지만 그 순수한 육체적 끌림과 영혼의 유혹이 현실의 삶을 무너뜨리려 하면 그것을 끊어내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긴다. 폴은 상대에게 생채기를 남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잔인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건 남성과 여성을 구분이 있을 수 없지만 과거 여성 내면의 소리는 이토록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고 있었던 것뿐일 것이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의 신장은 이제 여성도 자신의 더러움과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포한하는 것일까?
남녀를 불문하고 젊음에게 끌리는 것은 본성이다. 우리가 왜 해맑은 아기의 표정에 매료되는가? 그건 우리의 영혼이 젊음과 순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베이글녀, 훈남이라는 용어가 품은 근본적인 전제는 젊음이다. 그것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겉으로 대놓고 그것을 갈구하는 것이 자신이 저속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시선과 비난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 남자면 경찰에 신고해야겠죠. 스토커인데….”
내가 어느 독서 모임에서 이런 상황을 알려줬더니 임자 있는 여성에게 대놓고 들이대는 젊은 청년을 경찰서에 고발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 답변의 출처가 중년 여성이었다는 점이 다소 놀라웠다. 물론 공개적인 모임 장소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겠지만 문학을 읽고 토론을 하는 곳에서 그런 사회적 관념과 시선이 지배적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간은 단순하게 미학적 관점에서만 작품을 보지 않으며 복합적인 도덕 구성체로서 작품을 감상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사실 문학이란 그런 개인적인 생각과 사회적인 관념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평소 떠올릴 수 없던 고민과 상념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 문학 토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삶과 윤리도덕적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에선 그런 자리에서 조차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서로가 실명이 아닌 가명을 쓰고 아무런 개인 정보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조차도 자신은 타인에게 도덕적으로 비치고 싶다. 한 인간에게 윤리도덕적 낙인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일까...
그만큼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가 두렵다. 그런 점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이 1959년에 이 소설을 출간했다는 점은 놀랍다. 이 소설은 당시 남녀의 전통적 관념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는 언제나 그런 면에서 항상 빠르다. 프랑스 문학이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국가의 문학 보다 먼저 그런 기존의 관념들을 깨부수는 시도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2026년에 이 소설을 읽는 나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동양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혼자 공감하고 이해해도 대놓고 함께 의견과 생각을 나누며 공감하긴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발전해도 인간이란 결국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에 공동체적 관념에 반감이 있더라고 모른 척 편승해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 것이다. 자신이 예술가 혹은 혁신적 사상가로 살지 않는 이상은.
바그너와 브람스 사이
나 같은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브람스와 같은 순수의 시절과 바그너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싶은 욕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은 사랑을 하기 쉽다. 그건 그 남성의 사랑을 갈망하는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기회와 선택권이 많아지면 간절함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 있던 바그너가 친구의 아내를 탐하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둔 것은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윤리도덕이 타락할수록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을 수 있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그런 예술적 명망이 사적인 삶과 분리될 수 있는 서양 유럽의 사회적 환경과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실 예술과 문학에서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둘을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작품의 예술성이 제한되어 버린다. 예술과 문학은 감상자와 독자의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이지 작가의 삶을 이해하려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삶과 그 작품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더라도.
만약 10년 전 나였다면 나는 ‘폴’을 비난하고 욕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시몽의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에 더 많이 감정을 이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폴’의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태도를 이해하게 된다. 그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둘 사이의 경계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소설은 한 인간이 품고 있는 모순적인 양가감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떤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비열하고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개인)의 감정과 안위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감정과 영혼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미안해, 일 때문에…. 좀 늦을 거 같은데…”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이 암시하듯 이런 상황은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삶을 더욱 잔인하게 만든다.
바그너(권력)처럼 살고 싶고 브람스(순수)처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잔인해진다.
당신은 누구처럼 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