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 크리스틴 로젠 - 2nd -
“장소들이 공간으로 대체되고 있다… 공간은 정의와 의미를 얻을 때 장소가 된다.”
-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278p -
우리는 한때 길을 걸어서 이동해서 누군가를 만났다. 마을 어귀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고,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노크를 했다. 만남은 언제나 몸의 수고를 필요로 했다. 거리는 시간을 요구했고, 시간은 결심을 요구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기 위해 내 하루의 일부를 실제로 떼어내는 일이었다.
옛날의 만남에는 언제나 중력의 저항과 체온의 온기가 묻어 있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압력, 계절의 변화가 가져온 공기의 냄새,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주변을 서성이던 마음의 흔들림 같은 것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저항과 온기 그리고 서성임과 흔들림은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혁신과 발전이다. 때문에 기억과 추억의 장소는 수많은 편리한 공간들로 대체되어 버렸다.
우리는 몸보다 정신이 먼저 도착하는 시대를 산다. 말은 이제 공기가 아닌 빛(전자)을 타고 즉각적으로 전달된다. 순간 이동이다. 언어의 장벽도 허물어져 나는 내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러 국가 여러 도시에 사는 사람과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하루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실제로 건너간 적 없는 바다의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반응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손바닥 안에서 끊임없이 열리고 닫힌다. 수많은 읽지 않은 카톡 대화방과 인스타 DM이 나의 눈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한 장소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제 접속하는 존재이고, 분산되는 존재이며, 동시에 여러 결에 걸쳐 존재를 흩뿌리는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여러 공간에 존재한다. 그 존재는 공간마다 다른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오늘의 인간은 분명 연결의 공간 속에 산다. 연결의 공간은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여기와 저기, 안과 밖, 지금과 나중의 구분이 점점 엷어진다. 물리적으로는 부산 서면의 한 카페에 앉아 있음에도, 의식은 서울의 서점과 오사카의 맛집과 뉴욕의 번화가와 파리의 철학과 발리의 해변 사이를 거의 저항 없이 이동한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라기보다 파동에 가깝다. 한 곳에 고정되기보다 여러 곳에 동시에 흔적을 남기고, 하나의 얼굴로만 존재하기보다 여러 맥락 속에서 각기 다른 버전으로 반짝인다.
연결의 공간
나는 서두의 책 속 문장을 읽고 저자가 정의한 공간과 장소가 마치 양자물리의 세계와 고전물리의 세계를 연상케 했다. 장소에 입자(물질)로 존재하는 내가 아니라 확률로 존재하는 나, 명확한 좌표보다 불명확한 파장의 상태로 떠돌아다니는 세계, 손에 잡히는 실체보다 연결의 상태가 먼저 규정하는 세계. 연결의 공간은 분명 인간을 해방시켰다. 우리는 더 빨리 알고, 더 멀리 닿고, 더 많은 타자와 얽힐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특정한 장소와 계층과 제도 안에 갇혀 들을 수 없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 곁에 도달한다. 사상은 더 빠르게 순환하고, 취향은 더 자유롭게 증식하며, 고립된 개인도 언제든 자신과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연결은 분명 새로운 문명의 선물이다. 닫힌 방을 열고, 먼 존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인간의 경험 반경을 눈부시게 넓혀 놓았다.
그러나 넓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결의 공간이 너무 매끄럽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쉽게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클릭 한 번이면 들어갈 수 있고, 스크롤 한 번이면 떠날 수 있다. 대화는 시작되기 쉽지만, 머무름은 짧다. 관계는 접속되지만, 서로의 시간 속으로 깊게 스며들지는 못한다. 우리는 수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말은 많이 오가지만, 침묵을 함께 견디는 일은 드물다. 반응은 넘치지만, 기억은 얕다.
세계 전체와 이어져 있는 듯한 이 풍요 속에서, 이상하게도 인간은 점점 더 실감의 결핍을 호소한다. 마치 바다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두 발로 딛고 설 모래사장은 잃어버린 것처럼. 마치 바다 위의 파도처럼 이곳저곳을 떠돈다.
“태화쇼핑 앞에서 6시에 만나.”
“교보문고에서 3시에 만나.”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있다. 명소이다. 그리고 너와 내가 자주 찾는 장소도 있다. 그곳은 많은 이들과 너와 나의 추억이 저장되어 있는 공간이다.
장소는 연결의 공간과 다르다. 장소는 몸이 실제로 도착해야만 열리는 세계다. 그곳에는 거리의 피로가 있고, 시간의 지체가 있고, 기다림의 공백이 있다. 무엇보다 장소에는 (물리적) 저항이 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고, 늦으면 사과해야 하며, 불편한 공기는 그 자리에서 견뎌야 한다. 화면 속에서는 쉽게 편집할 수 있는 것들이 장소에서는 편집되지 않는다. 표정은 숨길 수 없고, 침묵은 어색함이 되지 않으며, 체온과 냄새와 자세와 시선의 떨림이 모두 관계를 형성하는 일부가 된다.
장소는 인간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너는 몸을 가진 존재라고. 너는 유한하며, 마찰을 피할 수 없고, 누군가와 진짜로 만난다는 것은 결국 어떤 불편과 책임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라고. 그래서 장소는 늘 중력의 세계에 속해 있다. 연결의 공간이 가볍고 빠르며 자유롭게 떠다니는 파동의 세계라면, 장소는 무겁고 느리며 끝내 닳아가는 사물들의 세계다. 벽은 빛바래고, 의자는 해지고, 자주 걷던 골목은 계절에 따라 냄새를 바꾸며, 우리의 얼굴에도 조금씩 시간이 내려앉는다. 장소는 늘 노화와 함께한다. 그리고 이 노화야말로 장소를 진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왜냐하면 노화하지 않는 것은 기억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낡지 않는 자리에는 머문 시간의 층이 쌓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늘 새것처럼만 남아 있다면, 거기에는 살아낸 흔적도 없다. 그러므로 장소란 단지 만나는 곳이 아니라, 함께 닳아가는 곳이다. 사람은 그곳에서 기다리며 늙고, 사랑하며 늙고, 싸우며 늙고, 화해하지 못한 채 돌아서며 늙는다.
장소는 그 모든 것을 침묵 속에서 받아 적는다. 오래 앉았던 카페의 창가 자리,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걸었던 골목,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지만 계속 꿈에 나오는 옛집. 그런 곳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곳은 한 인간의 시간이 물질과 결탁하여 남긴 흔적이다. 장소는 삶의 무대가 아니라 삶의 공동 저자다.
어쩌면 현대인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연결의 공간 속에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지만, 만남의 장소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깊이는 상실해 버린다. 우리는 언제든 다른 화면으로 건너갈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연결의 공간과 만남의 장소 사이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이어져 있지만, 그중 몇 사람과 실제로 함께 늙어갈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드넓은 세계를 공유하지만, 자기 존재를 추억과 기억으로 만들어 줄 장소를 갖지 못한다. 몸은 언제나 변함없는 어두운 방구석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외로움은 단순한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과잉 연결 속에서 발생하는 깊이의 결핍이다. 끊임없이 반응하지만 실제로는 닿지 못하고, 언제나 접속되어 있지만 끝내 안식할 자리를 찾지 못하는 상태. 마치 수천 개의 창문이 열려 있는데 정작 들어가 쉴 방은 없는 집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연결의 공간을 버리고 장소로 돌아가야 할까. 그럴 수도 없다.
연결의 공간은 이미 현대인의 의식 구조가 되었다. 효율과 속도 없이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나 홀로 원시인이 될 수 없다. 연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새로운 피부가 되었다. 문제는 연결 그 자체가 아니라, 연결이 만남을 대체한다고 믿는 데 있다. 만남이 사라져도 문제없을 거라는 착각. 연결은 가능성을 열지만, 만남은 존재를 변형시킨다. 연결은 정보를 주지만, 장소는 체온을 남긴다. 연결은 확장을 허락하지만, 장소는 각인을 남긴다. 우리를 정말 바꾸는 것은 대개 수천 번의 접속이 아니라 몇 번의 실제 만남이다. 어느 날 어떤 장소에서 들은 누군가에게 들은 한 문장, 함께 앉아 견뎠던 한 시간의 침묵, 함께 늙어가는 사물들 사이에서 나눈 짧은 시선. 그런 것들이 오히려 인간의 방향을 바꾼다.
결국 오늘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일 것이다. 연결의 공간에서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더 많은 사유와 문화와 타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남의 장소에서는 존재를 두껍게 해야 한다. 한 자리에서 충분히 머물고, 몇 사람과 끝까지 견디며, 시간과 장소를 함께 공유해야 한다. 연결이 우리를 세계로 열어 준다면, 장소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보낸다. 연결이 넓이를 준다면, 장소는 깊이를 준다. 연결이 속도를 준다면, 장소는 밀도를 준다.
인간은 이제 두 세계를 동시에 사는 존재다.
빛처럼 흩어지는 연결의 공간과, 나무처럼 닳아가는 만남의 장소 사이에서. 하나는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풀어헤치고, 다른 하나는 끝내 유한한 몸으로 다시 묶어 세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연결되었는가가 아니라, 그 연결들 가운데 무엇이 실제 만남으로 기억되고 추억되는가일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장소를 점유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장소와 함께 늙어갈 수 있는가일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끝내 이 둘의 긴장 속에서 자기 모양을 얻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계 전체와 이어지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단 하나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수없이 접속하고, 몇 번은 만나고, 드물게 깊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드문 깊이의 순간들만이, 연결의 홍수 속에서도 인간을 인간으로 남겨 둔다. 나는 마지막까지 인간이고 싶다.
당신은 데이터(정보)인가 기억(추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