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26-1 (개정판)
점심시간이 끝나고 시작되는 오후 업무는 항상 졸음과의 사투로 시작된다. 모니터의 화면 속 글자들이 여러 개로 보이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한다. 카페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어머!”
“방대리님는 어떻게 그렇게 여자 맘을 잘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먼저 연락이 오던데”
“와~ 여자가 대리님 너무 맘에 들어했나보다”
“정말 안 넘어갈 수가 없겠당”
탕비실 안에서는 그녀들의 수다가 진행되고 있다. 본사에 있는 여직원들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졸음 밀려오는 1~2시쯤이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탕비실로 모여든다. 그녀들은 2평 남짓한 좁은 탕비실에 모여 커피와 수다를 즐기며 졸음을 떠나 보낸다. 비공식적인 여직원들의 휴게시간이다. 그녀들의 수다에 항상 초청되는 게스트가 한 명 있다.
“희택씨 왔어? 커피 마시려구?”
“예 졸음이 와서요”
“맥심 아님 네스카페? 뭘로 주까?”
방대리, 달걀형의 아담한 얼굴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단정히 빗어내린 5:5 가르마가 인상적이다. 회사 점퍼도 다림질을 한듯 주름하나 없이 깔끔하다. 학창시절 꼭 한 두명씩 보이는 반 모범생 같은 느낌이랄까? 평범한 나도 그의 옆에 가면 왠지 불량스러운 느낌이 들게 만든다. 말과 행동을 더욱 단정하게 해야할 듯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그는 기획실 IT 파트 팀원이다. 그는 IT 파트장인 박대리보다 나이가 1 살 더 많지만 그의 팀원이다. 그는 의류업계 IT팀에서 4년간 일하다가 이쪽 조선업계로 이직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맞는 듯 보인다. 그의 말과 행동도 경상도 남자인 내가 들었을 땐 낯 간지러울 정도이다.
그는 구매와 재무팀의 ERP 시스템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여성들이 대부분인 의류업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서인지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아는 듯 했다. 본사의 여직원들은 그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여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대리나 오빠가 아닌 방언니로 불려지고 있었고 여직원과 남직원의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같은 존재였다.
“방대리님은 여직원들한테 인기가 많으시네요”
“적어도 희택씨보단 많을 껄 아마도 하하하”
나의 등장에 여직원들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얼마 전 기계사업부 여직원 ‘차달모’와의 욕설 사건이 전사에 퍼졌고 나는 여자를 울린 파렴치한이 되었다. 그녀들에게 사건의 전말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여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는 팩트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쓰레기가 될 수 밖에 없다. 폭력과 욕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 상대가 여자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정말 억울하다면 냉정하더라도 상대방이 모르게 증거를 확보한 후 법과 논리를 앞세워 공론화 해야한다. 그런 이성적 대응만이 쓰레기가 아닌 실질적 피해자로 역할을 뒤바꿀 수 있다.
당하는 입장에선 둘 다 기분 나쁘겠지만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후자가 더 손해다. 전자는 사회적 약자로 피해자의 감투를 쓰고 대중의 동정과 보호를 받지만 후자는 사건의 전말이 다 들어나기 때문에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고 상황은 역전된다.
남녀사이의 분쟁은 양쪽의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는 분쟁의 전말이 어찌되었건 중요치 않다. 뭐 과정을 다 들여다볼 시간도 없다. 그냥 자극적인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 언론은 그런식으로 대중을 오도(汚塗)한다. 자극적인 문구와 사진으로 도배한 뉴스만이 시청률을 확보한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치밀하고 이성적이진 않다. 당장 눈앞에 쌓여있는 업무들을 쳐내고 빨리 퇴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곳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냥 회사에서만 잠시 쓰레기 남직원으로 그녀들의 가쉽거리에 좀 오르내리면 그만이다. 평생 다닐 직장도 아니고 떠나면 볼일도 없을 것이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 얼른 믹스커피를 탄 종이컵을 들고 탕비실을 빠져나온다.
“희택씨야 여직원들하고 좀 친하게 지내라”
“예? 왜요?”
“여직원들한테 완전 찍힌거 같은데…”
“그런데요?”
“여직원들하고 등돌려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들을 이용할 줄 알아야지”
그는 확실히 여직원들의 덕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대부분의 여직원은 그가 요청하는 업무 협조에 적극적이다. 자기일인냥 두 손 걷어붙이고 도와준다. 그는 수시로 들어오는 여직원들의 소개팅 제안에 바쁜 주말을 보내는 듯 보였다. 걔 중에 그에게 관심있는 여직원도 있는 것 같지만, 방대리는 절대로 사내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발표 이후 아쉽지만 지인에게라도 소개해 주고픈 마음을 샘솟게 만들었나보다.
그의 인기는 발렌타인데이 때가 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날 아침이면 그의 책상엔 수많은 초콜릿 선물들이 쌓여있다. 나의 책상에는 미화씨가 전 기획실 팀원들에게 똑같이 나눠준 “ㄱㄴ"초콜렛 하나만 달랑 놓여있을 뿐이다.
“희택씨야 여자들은 말이야 말만 잘해도 떡이 떨어진다고”
“예?”
“돈드는 것도 아닌데 상냥하게 여자들이 대우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왜 그래야되죠? 좋아하지도 않는데…”
“흠… 희택씨가 좋아하든 말든은 중요치 않아, 여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해주고 그 순
간을 이용해 내가 취하고자 하는 것들을 취하면 되는거야”
그는 여자들의 감정을 이용할 줄 안다. 타인의 감성을 자극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감성 마케팅은 여자들의 지갑을 과감히 열게 만든다. 감성적인 드라마와 로맨틱한 광고 혹은 콘텐츠는 여심을 사로잡는다. 여심은 곧 돈이 된다.
“아놔~ 누가 자꾸 내 돈을 써!”
입담 좋은 유부남 상한씨가 던진 뼈있는 농담이 기억난다. 자본주의 소비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 바로 여자들이다. 남자는 돈을 버는데 시간을 쓰고 여자는 돈을 쓰는데 시간을 쓴다. 여자는 소비의 주체이다. 여자와 등돌리는 장사꾼는 거지꼴을 면치 못한다.
나는 장사꾼이 될 팔자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