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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직원의 종류

평범한 남자 EP 26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희택씨 미안한데… 재무팀으로 잠시 내려와 줄 수 있어요?"

"옛썰! 이대리님"


천사 누님의 호출이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반겨주는 친누나 같은 재무팀 15년차 원로 여직원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 회사를 계속 다녔다고 한다. 한 회사와 함께 청춘을 다 보냈다.


잔머리 없이 단정하게 빗어내린 단발의 반 묶음 머리에 하얀 피부가 조선시대 여인네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항상 반쯤 올라간 입고리와 환한 미소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 매력이 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어! 희택씨 왔어? 잠깐만!"


이대리의 옆에는 아직 볼에 젖살도 빠지지도 않은 듯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똘망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 보며 앉아 있다.


"대리님 얘네들은 누구예요?"

"아~ 인사해요 이제 한 식구가 될 아이들이야, 희택씨도 앞으로 잘 대해줘요"

“안녕하세욧”

“네 반가워요”

"그럼~ 대리님?!"

"응 나 한달 뒤에 결혼하잖아"

"아! 그런거군요…"


본사 관리본부(총무, 재무, 구매)에 여직원들은 다들 고졸 출신이다. 회사 초창기 때부터 같이 해온 멤버들이라 이제 다들 30대 중반의 혼기 찬 대리님들이다. 회사에는 과장 이상의 여직원이 없다.


아니다. 딱 한 명이 있다. 선박설계팀에 석사 출신의 엔지니어 한 명이 유일하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중독으로 유명한 과장이다. 소문에 아이들은 남편이 다 키운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그녀는 이 회사에 새로운 역사를 새겼다.


"희택씨 왔네? 참 얼마 전에 보희씨(차달모:차도녀달력모델) 소개팅 해줬다면서?"

"예?! 아~~ 예…"

"친구?!"

"예…"

"나도 연하 괜찮은데.. 희택씨가 몇 살이더라?"


재무팀의 해골 누님이시다. 천사 누님과 동기이며 이대리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생물실에 전시되어 있던 해골 모형이 닮아서 붙은 별칭이다. 앙상한 뼈에 살가죽만 붙어있는 모습이다. 기분이 좋지않다. 물론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말투와 행동이 상대방의 신경을 거스르는 습관이 문제다. 습관이 사람의 인상을 만든다.


회사는 기술, 연구직을 제외하고는 대졸이상의 여직원을 뽑지 않는 이해하기 힘든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혼 후 대부분이 아이가 생기기 전에 회사를 그만둔다. 회사에서 소정의 위로금을 챙겨주고 퇴사를 종용하는 분위기다. 만약 거부하면 위로금 한 푼없이 제 발로 나가게 될지 모른다.


유일하게 우리 기획팀의 미화씨만 예외다. 그녀는 얼마전 결혼 후 임신 6개월째 접어들어 부풀어진 배가 보일정도다. 그녀는 회사의 또 다른 역사를 쓸 것 같다. 회사에도 신여성의 바람이 부는 것인가?


어쨌든 회사는 여직원의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손실비용을 어떻게든 줄여보려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졸업도 하지 않은 여고생을 채용해서 오래도록 써먹는 것이다. 적어도 쟤네들이 결혼을 하기까지 10년은 부려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고졸 채용이라 대졸 직원보다 비용도 저렴하다. 때묻지 않은 하얀 백지는 그리는데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복을 입은 앳된 여학생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을 한다.


"어~ 그래요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해요"

"참! 희택씨 다름이 아니고 이거 좀…"


천사누님이 건넨건 빠표(发票:중국 영수증) 다발이다. 해외사업부의 박상무와 노대리는 요즘 중국 사업 악화로 자주 중국을 들락거리는 모양이다. 그녀는 그들이 중국에서 결재한 영수증의 내역을 몰라서 나에게 물어보려는 것이다. 노대리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성향을 아는 그녀는 그에게 매번 물어보는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좀 많지? 미안해, 희택씨 없었으면 나 어쩔뻔 했어, 매번 너무 고마워! 여기~"


천사는 서랍을 열어 "ㄱㄴ"초코릿 하나를 건넨다.


"뭘요~ 이정도 가지고~ 괜찮습니다! 올라가서 엑셀로 내용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드릴께요"

"그래~ 고마워!"


기획실 직원들이 모니터를 모여 웅성대고 있다. 느닷없는 인사 공고에 다들 수군대고 있다.


"우리팀에 홍일점 한명 추가네?!"

"해외사업부 키다리 아가씨가 우리부서에 오는거야?"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키다리 아가씨다. 그녀는 K협회 교육생때부터 알고 지낸 동생으로 나와 같이 해외 사업부에 입사했던 동기이다. 170cm 가 훌쩍 넘는 키에 옆에 서 있기엔 내 목이 부담스럽다. 커다란 키와 어울리지 않는 엥엥거리는 아기 목소리가 언발란스하다. 항상 뭔지 모를 액체(에센스인듯)에 젖어있는 단발파마 머리는 누가 보면 비맞고 돌아다니는 착각이 들게 할 수준이다. 그녀는 입사 당시 회사에서 화제였다. 어딜가도 튀는 키 때문인지,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키에 묻혀버린 난 주목 받기위해 목소리를 키웠던 것 같다. 그 목소리 덕분에 수습기간이 끝나고 전략 기획실로 발령났다.


"그런데 현지씨(키다리)가 왜 우리부서에..."

"혹시..."


회사에서 혹시란 말은 역시란 말과 상통한다. 미화씨의 임신이 그녀를 부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기획실 업무 과중으로 인원 충원이었지만 회사는 인원 충원에는 인색한 법이다. 기존 인원이 쓰러질 정도쯤 되어야 수혈을 해준다. 일당 백이 아닌 이백을 원하는 것이 회사가 아니던가?


"와~ 현지씨 오면 나도 이제 말동무가 생겼네, 다들 환영파티 준비해야죠"

"응… 그래야겠네"

“그…그래야죠 흐흐”


미화씨는 다른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환한 미소를 띈 반응에 다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난 고개를 떨구고 크게 한 숨을 내쉰다. 난 키다리 현지씨가 무섭다. 입사초기 그녀는 부단히 나를 힘들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만들어 내는 사건 사고 처리반 역할을 해야 했다.


한 번은 중국의 유명인사(랴오닝성 공산당 서기)가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S조선소의 대련(랴오닝성 소속) 대규모 투자에 대한 답례 행사차 방문했다가 우리 회사에도 방문하는 영광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중국사업은 워낙 정부관료와의 우호관계 유지가 중요한 터라 회장이 이하 임원들이 총동원되어 방문 행사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어가 가능한 나와 그녀는 해외영업부에서 행사 준비에 동원되었다. 그녀와 나는 행사단 일행을 회사로 모셔오는 에스코트 임무를 맡았다. 그녀와 나는 각각 역할을 정했다. 나는 행사 당일 아침 호텔 로비에서 그들을 만나 같이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회사로 모셔오는 것이다. 그녀는 식사가 마칠 때쯤 회사 밴을 가지고 호텔 앞으로 일행을 마중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가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않는다. 한 참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다 약속시간이 한 시간반이나 지나서야 나타난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게..."

"일단 빨리 갑시다."


그녀는 할말을 잃었는지 고갤 숙인채 애꿋은 손톱만 뜯는 것이 아닌가? 회사에선 난리가 난 모양이다. 호텔에서 회사로 이동하는 동안 수십통의 전화가 울렸다. 대리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사장까지 전화가 왔다. 1시간반이 지나도록 회장님이하 본사 전 직원이 회사 정문에 나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방문단이 도착하고 공장 참관등의 예정된 행사는 모두 취소되고 바로 회장실로 들어갔다. 우리 회사에게 주어진 2시간의 영접시간을 그녀와 내가 1시간반을 까먹은 것이다.


방문단이 떠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대리부터 사장까지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혼이 났다. 그런데 웃긴 건 나만 불려가는 것이다. 여직원은 면책이다. 그녀가 먹어야 할 욕을 내가 대신 먹어주는 원치 않은 기사도 정신을 강요당했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여직원은 권한도 주지 않는 거구나, 난 그런 불문율을 몰랐다. 같은 사원이지만 여직원의 책임까지 남직원이 품어줘야한다. 나중에 들은 그녀의 변명은 전날 배차 신청을 하는걸 깜빡 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회사에 나오니 차가 없었다는 어이없는 말을 변명이랍시고 늘어놓는다.


해외영업부 입사 회식 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떠넘긴 소주를 대신 마셔주고 공중전화박스에 쓰러져 잤던 그 날의 악몽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런 그녀가 다시 내 삶 속으로 들어오려 한다.


두렵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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