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은 불변의 다른 말

평범한 남자 시즌 2-66 (추가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어이! 전대리 누구랑 채팅하길래 그래 실실거리노?"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니가 이래 쪼개고 있을 때가? 고객사에서 중국 로컬업체도 입찰에 참여시키겠다고 하는데..."

"..."

"중국 업체들 단가 맞추려면 이제 공장 이익률은 우짤껀데?"

"차라리 그냥 중국 업체한테 신규 차종 수주를 넘겨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말이가 방구가? 너 머리에 물들어 갔냐? 이제 말을 그냥 생각없이 막 하네"

"예? 그게..."

"야! 됐고, 신규 차종 수주 날아가면 어째 되는지 모르나?"


신규 차종 수주는 중요하다. 공장의 매출과 공장 가동률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업체와 가격경쟁으로 기존의 단가 수준을 대폭 낮춰서 입찰을 따낸다는 것은 어찌보면 기존에 자사의 램프 납품 단가가 과다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꼴이 된다. 그러면 기존 다른 차종의 램프 단가에 대한 의구심을 고객에게 심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 로컬 램프 업체들의 품질 수준이나 관리 대응 능력은 아직 미숙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한국의 협력사들은 이미 국내에서부터 이런 시스템에 잘 트레이닝되어 있지만 현지 중국 업체들은 그렇지 않다.


기존 중국 완성차의 시스템과 비용을 생각하고 들어왔다가 심각한 품질 및 관리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더욱이 한국 기업의 협업관리 시스템도 그들이 맞춰갈리 만무하다. 완성차 내부 관리직 한국 직원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럼 자사의 품질 및 관리 능력이 우수성을 반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올해 사업계획에 맞는 매출과 이익을 달성해야 한다. 거기에 영업본부장과 해외영업팀장 그리고 중국 담당인 구 과장의 인사고과가 걸려있다. 확률이 정확하지 않은 곳에 배팅하며 자신의 앞길에 재를 뿌릴 사람은 없다. 당장의 실적만이 중요할 뿐이다. 장기적인 회사의 미래는 다른 이가 책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고객사의 품질 조건이 까다로워져서 최종 완성품에 대한 납품 램프 앗세이의 반품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램프의 품질 조건이라는 것이 점등이나 수밀, 내열 등을 기능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외관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 기능적인 불량은 안전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설계단계에서 철저히 관리되어 양산 단계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불량이 외관의 사소한 스크래치나 표면처리의 사소한 잡티(탄화, 이물 등)를 트집 잡아 전체 앗세이를 반품 처리한다. 최근 입고 불량 수치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었다.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이 상당하다. 그 때문에 공장의 이익률도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이다. 그렇기에 매출이라도 더 보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품질에서 돈 좀 찔러 넣고 해야는데... 돈을 안 쓰니 어디 사람을 움직일 수가 있나"


구과장의 뼈 있는 혼잣말이 안타까운 현실을 얘기한다. 중국 직원들의 월급은 한국의 1/3 수준이다. 중국 직원들은 회사 월급으로만 먹고 살려면 하루살이 삶 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중국 회사원의 급여 수준과 집값의 괴리는 한국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회사 봉급으로는 평생을 벌어도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없을 정도이다. 다른 주머니가 없다면 평생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중국 인민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중국 직원들은 딴 주머니를 찬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회사 돌아가는 걸 아는 직원들은 딴마음을 먹기 마련이다. 아니 먹지 않는다면 바보다.


회사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한다. 회사에 새는 돈이 한 두 푼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고객사 담당자를 달래야 하는 경우가 관례적이다. 다 보고 배우는 것이다. 회사에 야망을 품은 중국 직원은 회사의 급여를 올리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캐시 파이프(Cash pipe)를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에 혼심을 다한다. 그것이 직장인으로서 부를 축적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인간이 로봇이 아닌 이상 감정을 가지고 일을 하기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협력사에게는 없던 배려과 관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의 호주머니를 두둑이 채워주면 품질 불량 수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것이 습관이 되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상납해야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과거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불량 비용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었다.


"이제부터 회사에서 일체의 로비 비용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DG오토모티브 베이징 법인장의 선포로 기존에 고객사에 공식적으로 배정한 접대 및 로비 예산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 사이에 원성이 터져 나왔다. 고객사 담당자들의 비공식 불만이 협력사에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접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라는 곳은 수많은 인간들의 이해관계가 엮여있다. 누군가가 이익을 보려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한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직장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그 길에 익숙해져 벗어나지 못한다. 재수가 좋아 문제가 불거져 터지기 전에 탈출하면 다행이다. 그럼 또 누군가는 희생당한다.


겉으로는 고객과 협력사의 상생과 윈윈(Winwin)을 들먹이지만 윈(Win) 앤 루즈(Lose)가 현실이다.




"사내 도서관 가봤어? 생각 이상이던데"

"그니까요? 알록달록하게 꾸며놓은 게 완전 딴 세상 같던데요 칙칙한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여직원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다들 거기로 가서 사진 찍고 난리던데요"

"거기서 무슨 사진을 찍고 그런데?"

"그 벽에 그려진 그림 안 보셨어요? 무슨 순정만화 같던데... 회사 점퍼 입고 있는 남직원과 여직원의 러브스토리를 연상케 하는 하하하"

"어, 그거 나도 봤는데 그림 꽤나 잘 그렸던데"

"근데 누가 그린 거래?"

"인사팀에 새로온 신입 여직원이 그린거라고 하던데요"


사내 도서관이 완성되고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해외영업팀에서도 아침부터 그 얘기가 한창이다. 벽마다 아늑한 파스텔 톤의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칙칙한 잿빛으로 도배된 회사 건물과는 색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나 또한 그녀가 알려준 다채로운 색상의 페인트를 칠할 때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짐짓 우려스러운 마음이었다. 인사팀장도 처음 그녀가 만든 도서관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그녀가 일을 이렇게까지 벌여놓을꺼라곤 생각치 못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생각없이 그냥 그녀가 한 행동을 질책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나서 폭발적인 직원들의 반응에 이내 태도를 바꿨다. 온라인 사내 게시판에는 도서관 얘기로 도배되었다. 결국 이 일은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회장이 직접 사내 도서관을 방문했다. 회사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도서관을 보고 회장도 눈이 휘둥그레 졌다. 보수적인 자동차 제조업에서 오랜 세월을 일해오며 이런 경우는 처음 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누가 지시한 건가?”

“제가 했습니다. 아버님 아.. 아니 회장님”

“뭐 니가?”

“뭣 때매?”


회장은 아들인 사장을 노려본다. 아들인 사장은 도서관에 대한 직원의 만족도와 시대 분위기 변화 등의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회장의 당혹감을 안도감으로 바꿔놓았다. 한참 동안 논리정연하고 설득력있는 사장의 설명을 들은 회장은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듯 보였다. 회장은 뒷짐을 지고 도서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뒤에선 임원진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회장을 지켜본다. 회장은 도서관 한쪽 벽에 그려진 벽화 앞에 서서 그림을 응시한다.


"근데 저 그림은 누가 그렸나?"

"인사팀 배유진 사원이 그렸습니다.”

“누구지?”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인사팀 신입사원 배유진입니다.”

“자네가 이 사내 도서관 조성을 추진했나?”

“네 그렇습니다.”

"가만보니 저 그림 속 여직원이랑 닮았구만, 그 옆에 남자 직원 그림은 누군가? 미래의 남편인가?"

“네?! 아니…”

"하하하"

"하하하"


그림 속에는 서로 책을 읽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직원과 남직원의 다정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회장은 그림 속 여직원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웃음 짓는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임원들과 직원들도 다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사장의 설득으로 사내 도서관 활성화 방안으로 예산이 편성되었다. 사내 독서 문화를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어이! 전대리 뭔 책 빌린거냐? [아플수도 없는 마흔이다] 하하하, 어이! 이제 갓 서른 넘긴 놈이 무슨 마흔 타령이냐"

"예...헤헤헤 그냥... 마흔의 느낌이 궁금해서요"

"야 그건 저기 주팀장님한테 물어보믄 되지! 하하"

"뭐냐!? 뭔데 날 들먹이냐?"

"전대리가 마흔의 심정이 궁금하답니다"

"야! 그런거 신경 쓸 겨를 있음 중국 공장 이익률 올릴 생각이나 좀 더 해라!"


구과장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정말 주팀장의 머리 속이 궁금해서 빌린 책이다. 중년의 직장남성은 왜 저렇게 살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알려주지 않을까 해서 빌린 책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기에 돌입한 중년의 직장인,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와 아내의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는 운명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것을 책으로 이해하긴 쉽진 않겠지만 주팀장이 직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안타깝다. 그는 마치 자신이 원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젠 그 동안의 들인 시간과 노력 때문에 벗어날 수도 없다. 그가 쏟아 부운 청춘의 시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가족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DG 오토모티브의 영업팀장의 자리를 잃는 것만이 아니다. 가장의 역할도 잃어버릴 수 있는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도 열정과 패기로 가득찬 청춘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열정과 패기를 쏟아 부은 대가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


"전대리! 부사장님한테 올릴 해외영업 분기 실적 보고 자료 다 정리됐어?"

"예 팀장님! 거의 다 됐습니다"

"보자 얼른!"

"예!"

"야! 이게 뭐야?"

"네?!"

"보고서 양식 바꾸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앗! 죄송합니다!"

"하아! 참 어쩔 거야 부사장님이 직접 얘기하신 건데..."

"다시 작성해 오겠습니다."

"야! 됐어! 무슨 지금 오후 4시가 넘었는데... 부사장님 좀 있음 나가실 텐데 그냥 줘! 정신 좀 차리자 제발!"


오후 4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해가 기울고 몸은 나른해지며 얼굴엔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랑 닮아있다. 20대의 패기와 30대의 열정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중년의 노련함이 장착되긴 했지만 그 노련함은 새로움을 싫어한다.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 뛰어갈 사람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른 이들은 다들 앞서 나가는데 자신만 뒷걸음 칠 수 없다. 그건 마치 인생의 낙오자 혹은 패배자로 비춰진다. 다수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 믿고 그 길 위에서 선두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길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사회가 원하고 가족이 원하는 길을 달려간다.


마흔은 불혹(不惑)이다. 불혹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은 다르게 얘기하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혹(不惑)은 불변(不變)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이제 지켜야 할 것들 너무 많다. 변화보단 안정을, 소명(召命)이 아닌 숙명(宿命)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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