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67 (추가개정판)
"와~ 너무 배부른데…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유진씨! 커피 한잔 해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아녜요 대리님! 오늘은 제가 풀 서비스 하겠습니다. 대리님 아녔으면 도서관도 그렇게 꾸미지 못했을
텐데 제가 제대로 모셔야죠 하하하 뭐 드시겠어요? 제가 사 올게요"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럼 뭐 사양치 않겠습니다. 카페모카 한잔?!"
"앗! 나도 따뜻한 카페모카 생각났었는데 하하하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도서관 페인트 건으로 감사의 식사 대접을 하겠다며 일요일 오후 시간을 비워달라고 했다. 그녀는 수성 못에 위치한 이름 있는 고깃집을 예약까지 하며 나를 대접했다. 매번 누군가를 접대만 해봤지 이렇게 대접받는 것에 익숙지 않다. 어색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래서 접대를 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골적인 접대일수록 부담스럽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아마 상대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존재감이 커지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 간에 얼굴을 맞대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하며 선물을 주고 받으며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없던 호감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업의 가장 기본은 일단 무조건 만나는 것이다.상대방의 시간을 얻어내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비록 그 만남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조차 하지 않는 자들보다는 애정이 더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법과 규율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을 잘 이용하는 자만이 세상을 움직이고 통제할 수 있다는 법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높으신 분들은 세상 사람들을 법과 규율로 통제하고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것들을 벗어난 행동을 일삼으며 세상을 호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리! 준비 다 됐어? 어서 가자!"
"예 오늘 이사님도 같이 가시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장부장! 출발하지!"
"옙!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가시죠"
"이사님! 부장님! 저기 이거…"
"역시 저희 고대리가 참 이런 건 잘 챙깁니다 하하하"
“하하하”
회사에서도 최소 분기별로 한 번씩은 고객사 담당자를 찾아 접대를 하는 것이 비공식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국내 영업팀의 고정안 대리는 그들을 뒤쫓으며 검은 비닐 봉지를 벌린 채 둘에게 들이민다. 견이사와 장 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봉지 안에 들어있는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 마시면서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오늘 국내영업팀 코 빠지게 마시겠구만"
"오늘 이사님도 가는 거 보니 제대로 접대할 일이 있나 본데요"
"어~이! 전대리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거야, 분기 때마다 저래 불려가서 알랑방귀 뀌면서 접대 안 하는 것만 해도 어디야, 게다가 천만다행이지, 우리 담당자는 또 술을 안 좋아해요. 옛날 독사 과장 담당이었을 때 생각만 하면 우욱! 토 나올 거 같다. 전대리는 복도 많지"
'그래 안 그래음 벌써 나갔겠지'
바깥일이 힘들면 안에서는 휴식과 충전이 필요하다. 바깥일이 쉽다면 안에서 좀 괴로워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안팎으로 힘들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구과장의 말대로 해외영업팀은 시공간의 격차로 정기적인 접대가 쉽지 않아 출장 시에 여건이 되면 현지의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자리를 마련해 접대를 하곤 한다. 접대라고 해봐야 식사 한끼에 술을 좀 곁들일 뿐 그 이상은 문화차이로 인해 서로가 불편하다. 반면 국내 영업팀은 분기 결산이 끝나고 나면 영업이사 혹은 팀장과 담당자가 같이 고객사 본사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거창한 접대를 치르고 온다. 적지 않은 비용을 하룻밤의 유흥을 위해 쏟아붓는다. 회사에서도 국내 영업팀에겐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비용이다.
일반 직장인으로 평소에는 범접할 수 없는 그런 화려하고 거창한 접대가 가능하다. 그러면 담당자는 그 접대를 잊을 수 없게 된다. 그 말은 그 협력사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강렬한 인상은 제품경쟁력이나 우수한 품질보다 더 강력하다. 뛰어난 제품은 회사에 발전을 가져오지만 뛰어난 접대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인간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은 오감을 자극하는 무언가로 표현해야만 전달되는 법이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말과 표정만으로 표현한다면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냉대받기 십상이다.
"대리님 여기!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세요?"
"아! 예 아무것도 그냥..."
그녀는 커피를 건넨다. 따뜻한 커피의 온기가 손을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 그녀와 나와 벤치에 앉아 수성못을 바라본다. 오후의 햇살이 호수 위 수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살에 닿는 햇살의 따사로움과 아직은 데워지지 않은 초봄의 쌀쌀한 공기가 기분 좋은 긴장을 유지시켜 준다.
"와! 저기 오리배가 있네요"
"그러네요"
"와 재밌겠다"
"탈래요?"
"에이! 아직 다리가 오리배 탈 정도는 아녜요"
"음... 배는 내가 저으면 되죠! 자! 가요"
그녀는 깁스를 풀었지만 아직 다 완쾌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오리배를 바라보는 표정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하기가 쉽지 않다. 밥과 디저트까지 얻어먹었으니 힘이라도 좀 써야 할 모양이다. 돈이 아니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법이다.
"와! 너무 재밌어요 대리님! 저 오리배는 처음이에요"
"후웃~ 후훗~ 그래요? 저도 처음인데..."
페달을 밟을수록 나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오리배는 서서히 호수의 중앙으로 나아간다. 혼자서 열심히 페달을 저으며 먹었던 고기들을 소화시키고 있다. 이마에는 송골 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호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즐거워한다.
'생각보다 힘드네 괜한 말을 했나?'
"대리님은 왜 여기 대구까지 오셨어요?"
"예?! 음... 뭐 돈 벌러 왔죠, 부산엔 일할 데가 별로 없어요, 특히 남자들에게는, 있다해도 급여 수준도 너무 낮아서"
"아 그러셨구나"
"그런 유진 씨는 왜 대구에 왔어요?"
"음... 그냥 꼭 한 번 와보고 싶더라구요. "
"…”
“누구나 있지 않나요? 평생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 여기가 저에겐 그런 곳이예요”
그녀는 커피를 입술에 가져다 데며 잠시 말을 멈춘다. 멀리 해가 기울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다. 붉게 상기된 듯한 그녀의 표정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녀는 노을을 바라보고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깊이 자신만의 사연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 쉽게 꺼낼 수 없다. 누군가와 그런 사연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랑 혹은 우정 이전에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믿음이 확신이 되면 사랑과 우정은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유진씨 미국에서 왔다면서요?"
"예? 어..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요 회사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리지날 미국사람이라면서요"
"헐... 회사라는 곳 참 무섭네요"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자이다. 게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비지니스 스쿨을 졸업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이다. 그런 그녀가 한국의 지방 도시 대구의 한 중견기업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평범한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학벌로는 가장 톱이다. 특이한 점은 유일하게 회장의 큰 아들인 사장이 그녀와 같은 학교 동문이다. 둘은 적지 않은 나이 차이로 학교에서 만났을 리는 만무하지만 사장은 그녀의 이력서를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물론 사장뿐만 아니라 회장 이하 인사 관련 임원들과 인사팀 직원들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스펙으로만 친다면 역대급 지원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녀가 학벌 위조가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스탠퍼드 대학에 직접 연락하여 그녀의 졸업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사장은 직접 유선으로 그녀에게 합격통보를 전달했고 회사에 유일한 동문 라인이라도 만들 기세였다. 다들 그녀가 별 생각 없이 넣어본 이력서 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최종 합격통보를 받고 입사일자에 나타났다.사장은 처음에 그녀에게 미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구 본사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입사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본사 인사팀으로 발령이 났다.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나로서는..."
"뭐가요?"
"뭐긴요? 그 정도 학벌이면 뭐 미국 실리콘밸리에 이름있는 기업에 들어가고도 남을 스펙인데 굳이 이곳 한국의 지방도시까지 와서 그것도 시골구석 떼기 기숙사에서 박봉을 받으며 지내는 이유가..."
"하하하 대리님 뭐가 그리 길어요, 한국 사람들은 왜 물어보는 게 다들 하나같이 똑같죠?"
"음... 그런가요?"
"제 친구들은 다들 멋있다. 역시 너 답다. 대단하다 그렇게 얘기하던데... 하하"
"예?! 뭐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요?"
"예"
"전 사실 높은 급여, 좋은 환경 뭐 그런 걸 바라고 그 학교를 들어간 거 아녜요"
"그럼...?"
"대리님... 좀 춥지 않아요?"
하늘 저편에서 먹물을 머금은 듯한 솜뭉치들이 몰려오고 있다. 바람도 점점 거세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코트의 옷깃을 여민다. 반대편에는 해가 산의 윤곽선에 걸려 빛을 잃어가고 있다. 호수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휘리리릭!"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호수변의 오리배 선착장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뭐라고 소리치며 우릴 향해 손짓한다. 빨리 호수를 나오라고 손짓하는 듯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호수 위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급히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하필 바람도 역풍이다.
"후훗 후훗"
"대리님 힘들죠 괜히 제가 오리배는 타자고 해서... 어머! 이 이마에 땀 좀봐!"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준다. 그녀의 손수건이 나의 이마에 닿는 순간 은은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노동의 가치가 값지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다리는 고통 받고 있지만 나의 뇌는 행복을 느낀다.
고통과 행복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생각되지만 사실 둘은 같이 다닌다. 고통 뒤에는 행복이 따라온다.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나 강도가 낮아지는 순간에는 안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강할수록 그것이 멎을 때의 행복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만약 고통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소박할지라도 강력한 희열의 순간을 선사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고통도 행복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이다.
“솨아아악~~”
먹구름은 어느새 호수 위를 뒤덮었고 빛은 사라지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굵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비는 거센 바람을 만나 오리배 안으로 몰아쳐 들어온다. 나와 유진은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풍덩!"
"앗! 대리님!"
거센 폭풍우에 잔잔하던 호수는 성난 바다가 되어버렸다. 거세게 출렁이던 파도 아니 물결에 순간 오리배가 심하게 기울어졌다. 패달은 젖던 나는 그만 균형을 잃고 물 속을 빠져버렸다.
“푸앗~ 허어억! 살.. 살려 우읍”
숨을 쉬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보려 발버둥을 쳐 보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물결에 입 속으로 공기가 아닌 물이 차 들어온다. 정신이 조금씩 혼미해지고 팔다리는 뇌의 지령을 무시하고 부동의 상태로 전환한다. 몸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눈도 천천히 감긴다. 그 때 였다.
“풍덩!”
희미해진 눈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물 속에서 나의 뺨을 때린다. 물 속이라 그런지 아프지가 않다. 아프지 않으니 눈은 계속 감긴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나의 몸을 휘감고 힘차게 수면으로 올라간다. 그녀는 나를 수면 위에 하늘로 향해 뉘인채로 헤엄을 치며 호수가로 나아간다. 한 팔로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 팔과 두 다리는 쉴새 없이 물살을 휘젓는다. 차가운 물 속에서 엄청난 칼로리를 태우며 열을 그녀의 체온이 나에게 전해진다.
“푸우우욱!”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몸이 요동치며 입 밖으로 물이 솟구쳤고 그녀는 그 솟구치는 물을 얼굴에 얻어맞았다.
“푸웃! 대리님! 괜찮아요?”
“어! 유진씨 어떻게 된 거예요?”
“휴~ 하아~ 다행이네요”
유진는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선 풀밭에 털썩 드러눕는다.
“총각~ 저 아가씨 아녔으면 물귀신 될 뻔 했어”
오리배 관리인은 유진은 나를 뭍으로 끌어올려 숨을 쉬지 않는 나를 확인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고 알려준다. 그녀는 차가운 물속에서 나를 끌어올리고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기진맥진해 버린 모양이다. 잠시 뒤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나의 상태가 정상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나와 유진은 오리배 관리인이 머무는 컨테이너 박스 안, 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몸을 녹였다. 비가 그치고 호수는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다.
"에취! 으흐흐흐"
"대리님 괜찮으세요?"
"전 괜찮아요, 유진씨는 괜찮아요?"
“괜..괜찮아요 이~취!”
"하하하 감기 걸리시는 거 아녜요”
봄이 찾아왔지만 호숫물은 아직 겨울을 냉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모양이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일어설 정도로 차갑다. 봄날의 햇살은 대지를 데우지만 아직 호수를 데우기엔 부족하다.
"으흐흐흐 그러게요 어디 따뜻한데 가서 몸을 좀 녹여야 겠는걸요"
"아! 찜질방 가요!"
"예?! 찜질방?"
"예 저기 간판 보이네요!"
찜질방 카운터에 서 있는 여직원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들어오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목욕만 하시는 거예요?"
"아뇨! 찜질이랑 같이 해주세요 여기!"
"아니 유진 씨! 이건 제가 계산할게요"
"괜찮아요 대리님은 식혜랑 삶은 계란 쏘세요 하하"
"하하하"
"대리님 그럼 좀 있다 봐요!"
탕 속으로 몸을 넣자 몸 속에 남아있던 냉기가 탕 속으로 빠져나가고 더운 열기를 빨아들인다. 에너지의 평형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아.... 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탄성인지 신음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소리가 터져나온다. 눈을 감는다. 잠시 뒤 컴컴해진 눈 앞이 다시 밝아지고 좀 전에 오리배 위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땀을 닦아주던 그녀의 얼굴 곳곳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드란 살결 위에 환한 이마, 짙지도 엷지도 않은 눈썹, 오똑한 코 그리고 그 아래 윤기 있는 연분홍 입술이 눈 안 가득히 차 들어온다.
순간, 탕 속 잠겨있는 다리 사이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온다. 탕 속의 열기에 이완된 혈관으로 엄청난 혈류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순간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부끄러운 마음에 몸을 돌려 눕는다.
'아놔! 이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저속한 생각들을 지워버리려 머리를 흔든다. 그럴수록 그 생각들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생생해지는 느낌이다. 스스로를 자책한다. 순수한 그녀에게서 느끼는 순수하지 않은 나의 감정에 죄책감을 느낀다. 또 그 감정에 반응하는 나의 몸이 부끄러워진다. 사실 매혹적인 이성을 향한 육체적인 반응은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모습에 때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이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생명을 가진 만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그런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인간세상은 순수한 것을 추악하게 만들고 추악한 것들을 순수하게 포장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왜 신은 인간에게 이런 순수한 죄의식을 주신 걸까?'
그 곳 혈관 속 혈류량을 줄이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고귀한 신과 나와의 순수한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