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

평범한 남자 시즌 2-80 (final, 추가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YTM 뉴스 속보입니다.


DG 오토모티브 대표의 여직원 성추행 사건 관련 행방이 묘연했던 해당 여직원 배모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범인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언니 안모 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안타깝지만 피해자의 시신과 함께 범인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을 추정됩니다.


피해자 배모양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두부(頭部) 골절에 의한 과다출혈입니다.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사체 부검 결과 범인은 큰 바위 같은 딱딱한 물체로 수 차례 내린 친 경우 이런 류의 함몰형 두개골 골절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DG 오토모티브 대표 이모 씨는 사체가 발견되고 사인에 대한 의혹이 풀리자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습니다.


사건 당일 여직원과 말다툼이 있었고 홧김에 논두렁에서 그녀에게 물리적 폭행을 가했고 그 충격에 논두렁 밑으로 굴러 떨어진 배모양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오인하고 겁에 질려 사건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범인인 안모양이 주변에서 숨어 그 상황을 지켜보다 이모씨가 사라지고 난 후 방모 양의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머리에 바위로 여러 번의 충격을 가해 살해하고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긴 것을 추정됩니다.


안모양이 수기로 적은 일기장에 근거해 볼 때 그녀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는 평소 흠모하던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피해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아파트 메인 입구에 가로등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폭우와 어둠으로 CCTV로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전조등과 미등을 켜지 않은 채 메인 입구로 빠져나갔습니다. 최초 범행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재판부는 범인의 집에서 발견된 사체와 그녀의 자필 일기장의 내용과 정황 등으로 미루어 살인 후 죄책감에 의한 자살로 판결 지었습니다. 그리고 혐의를 계속 부인해 오던 DG오토모티브의 이모 대표는 폭행죄와 거짓진술 등의 혐의를 적용 징역 1년형이 내려졌습니다.]



뉴스에선 여직원 성추행 관련 기사가 어느새 남녀의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막장에 막장을 추가한 1+1 패키지 사건은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 하지만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만 관심을 둔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뉴스들은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 잠시 기억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더 자극적인 뉴스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일상의 지루함을 자극적인 뉴스로 해소하려 한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건 마치 대중의 일상 속의 따분함을 덜어주려 생겨나는 듯하다. 대중은 사건의 당사자들이 겪었을 감정과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뉴스에서 드러난 사실들이 진실인 듯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버리는 아나운서가 야속하다. 자신은 고상한 척하며 혀를 차고 욕을 하며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야속하긴 매한가지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매 맞은 사람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매를 든 사람이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다들 매 맞은 기억만 떠올릴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만연하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사랑에 굶주렸던 두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이루려 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파국(破局)을 맞이했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사랑을 이룰 수도 없는 그런 것일까? 사랑도 마치 돈처럼 가진 자들만 계속 가져가는 그런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부가 대물림 되듯 사랑도 대물림된다. 결국 사랑받지 못한 자는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애정의 표현은 학습된 것이다. 학습되지 않은 애정은 표현될 수 없다. 무관심은 무관심을 생산할 뿐이다. 관심과 애정을 받아보지 못한 자는 다가오는 관심과 애정이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그 뒤에 다른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혹여 그 관심과 애정에 빠져든다면 그건 금세 집착으로 변질된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한다. 집착이 이성과 일상을 무너뜨린다. 사랑도 받아본 자들이 받을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두 어린양이 당신께 돌아가려 합니다. 죄지은 자 그 죄를 용서하시고 억울한 자는 그 영혼을 달래주옵소서,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소망이니 주의 위로와 평안을 더하여 주옵소서"


유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 옆에 안에스더가 같이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둘의 영정사진이 나란히 놓여있다. 환한 둘의 미소 앞에 나는 또 한 번 오열한다. 목장 식구들과 몇 되지 않는 교회의 조문객들이 자리한 가운데 목사가 그녀들의 마지막을 위해 기도한다. 난 그녀를 용서하려 한다. 용서만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안에스더가 가는 길에서라도 유진의 용서를 받길 바라본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자신도 이유도 모두 사라졌다.


이른 새벽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공단의 거리는 아직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있다. 회사 정문을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간다. 경비실 안에 경비 아저씨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 새벽잠에 빠져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사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불을 켜자 벽에 그려진 다정한 사내 커플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가서 웃고 있는 공도리와 공수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유진과의 추억들이 영사기 속 필름처럼 머릿속에 재생된다.


도서관에 책장을 둘러본다.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이 좁은 공간에 수많은 세계가 공존한다. 그녀는 그 수많은 세계를 드나들며 자신을 옭아매었던 과거를 벗어나려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어!? 뭐지?"


책장 가장 위쪽 한 구석에 하얀 아이보리 색으로 책 커버가 덮혀진 두툼한 책이 보인다.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그 책을 꺼내 든다.


"A little prince without crime and punishment"


[어린 왕자]와 [죄와 벌]이 한 권으로 묶여 있다. 표지에는 [죄와 벌이 없는 어린 왕자]라고 영문으로 쓰여있다. 아마 그녀의 일기장 커버는 이 두 책에서 떼어낸 듯하다. 그녀는 왜 이 두 책을 엮었을까? 어린아이들은 죄와 벌이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그렇게 지나온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죄와 벌로 얼룩져 간다.


"난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리고 해외영업팀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은 아직 어둠 속에 잠자고 있다. 한쪽 벽에 있는 형광등을 스위치를 켠다. 넓은 사무실에 빛이 들자 어둠이 사라진다. 그렇게 다시 일상의 아침이 시작된다. 입사 첫날 사무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 사무실 불을 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다.


처음과 마지막이 같다. 겉으로 봤을 때 빛이 조금 바랬을 뿐 같은 검은색 정장차림의 구두는 입사 때의 모습과 같다. 왁스로 단정하게 세팅된 머리는 새치가 좀 많아진 것 말고는 길고 짧음의 변화만 느껴질 뿐 같다. 얼굴은 표정이 이전보다 좀 더 굳었을 뿐 피부톤을 보정해 주는 기능성 화장품 덕분인지 겉으로 보기엔 입사 때 밝던 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희택 대리]


나의 책상 파티션 위에 붙여져 있는 나의 명찰이 눈에 들어온다. 바뀐 것이라곤 [사원]에서 [대리]로 명찰 뒤 직함이 바뀌었을 뿐이다.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처음 이 사무실에 첫 발을 내디딜 때의 내 안에 전희택은 사라졌다. 지금은 새로운 전희택이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10년, 20년 전의 모습을 유지하려 각종 영양제와 방부제를 먹고 바르며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려 하지만 내 안에 자신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 아니 변질되어 간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스스로 변화한 것이 아닌 관계와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아이 같은 동안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내면 아이는 점차 능구렁이로 변해간다.


“오~ 전대리, 일찍 나왔구만”


누군가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이웅재 전무 아니 이제 부사장으로 나와 같이 직함이 바뀐 그가 입사 첫날의 그때와 같이 내 앞에 서 있다. 그의 모습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처음도 하얀 백발이었고 지금도 하얀 백발이다. 다만 그전에도 많지 않던 숱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금테 안경은 최신의 트렌드에 맞게 조금 더 젊어 보이는 검은색 뿔테 안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도 내면에는 또 다른 이웅재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요즘 많이 힘들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허허허”

“….”

“전대리! 사는 게 견디기 힘들 만큼 힘들다가도 지나고 나면 편안하고 즐거운 순간이 찾아온다네, 그것도 잠시 이내 심심하고 지루해지지 그런데 그 지루함도 오래가진 않아, 또다시 고통이 찾아오거든, 그게 마치 시계추 같아. 그렇게 계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 인생이 있다네. 피할 수 없지, 시간이 멈춰야만 그 고통도 지루함도 사라진다네, 물론 편안함과 즐거움도 사라지겠지만…”

“부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잘 모르겠지? 그건 말이야 자네가 더 살아야 할 이유인 거야”

“…”

"힘들지? 그래도 힘내! 다가올 즐거운 순간들이 있을 걸세"

"...: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한참 동안 그가 들어간 사무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반복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삶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란 말인가? 그럼 그다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반복되는 삶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무엇이 반복될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아니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팀장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사직서]


이제 떠나야 할 때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자는 망설이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사랑이 떠나고 다시 직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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